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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 (수)

“반국가단체 누명 벗고 웃으며 한국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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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한통련은 서럽다 ① 손형근 한통련 의장 인터뷰

한국민주화·통일운동 외길 한통련

박정희 정권 때 ‘반국가단체’ 낙인

노무현 정부 때 정치적 복권 됐으나

이명박 정부부터 또다시 탄압 대상

주요 간부들 여권 기한 대폭 축소

의장에겐 아예 발급조차 안 해줘

문재인 정부 출범 뒤에도 개선 안돼

현지 영사들 여전히 색깔론 들이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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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가 이뤄진 뒤 과거 독재정권 시절 핍박과 박해를 받은 많은 사람이 법으로, 때로는 사회적으로 노고를 치하받았으며, 어떤 이들은 보상도 받았다. 제대로 된 국가와 사회공동체라면 수고한 사람들과 피해자들을 마땅히 칭찬하거나 보상 또는 배상해야 한다. 그러나 오랜 민주화 활동에도 보상이나 치하를 받기는커녕 국민의 기본권도 못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40여년간 일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해온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회원들이 그들이다. 노무현 정부 때 잠깐 정치적으로 복권됐지만, 그 뒤 다시 여권 발급 배제와 차별 등 냉대를 받고 있다. 40년 전인 1978년 한통련을 낙인 찍은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규정을 빌미로 삼고 있다. 이런 푸대접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한겨레> 토요판은 국가보안법 제정·공포(1948년 12월1일) 70년을 맞아 한통련의 아픔을 두차례에 걸쳐 다룬다. 첫번째로 손형근 한통련 의장의 인터뷰를 싣는다. 인터뷰는 지난달 22일 오후 일본 도쿄의 중심인 지요다구에 있는 한통련 사무실에서 했다.

“이것부터 좀 보라. 한국 정부가 아직도 한통련을 이렇게 취급하고 있다.”

인터뷰를 하려 자리에 앉자마자 손형근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의장(67·이하 호칭 생략)은 ‘신원확인서’ 양식 두장을 책상 위에 펼쳤다. 재일동포들이 여권을 신청할 때 주일 한국영사관에 적어내는 서류다. 주소와 가족관계, 직업, 학력 등의 주요 정보를 기록해야 한다. 그중 한칸에는 ‘조총련 또는 한통련 경력’을 적도록 하고 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한국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위해 활동해온 한통련을 북한과 직접 연계가 있는 총련(조총련)과 동급으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도 이 서류가 사용되나?

“도쿄에서는 아니지만 오사카와 고베 등 다른 지방에서는 지금도 쓰인다. 정직하게 한통련 경력을 적으면 어떤 사람은 1년, 어떤 이는 3년짜리 여권을 내준다. 안 써도 국가정보원(국정원)에서 어떻게 알고는 ‘솔직히 안 적었다’며 여권 유효 기간을 축소한다.”

지난 5월에도 여권 신청 퇴짜당해

보통 일반인은 10년 기한의 여권을 받지만, 도쿄 본부의 박남인(부의장)은 1년, 김지영(재일한국민주여성회 회장)은 3년짜리다. 한통련 오사카 본부의 김융사(대표)의 여권도 기한이 1년이다. 한통련의 대표자인 손형근은 아예 여권이 없다. 지난 5월 주일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신청했지만, 한달 뒤 여권을 발급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대신 ‘국정원에 조사받으러 간다면 임시 여권은 내줄 수 있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없었던 ‘한통련 여권 차별’은 이명박 정부 때 시작됐다. 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차별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관은 “해외에서 여권 발급 권한은 외교부 직원이 아니라 국정원 직원인 현지 영사에게 있다. 정부만 바뀌었지 국정원은 사람이나 관행이 아직 하나도 안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손형근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5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여권 갱신을 거부당했다. 이에 반발해 당시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여권 발급 거부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내자, 정부가 이번에는 ‘당신은 국가보안법상 기소중지 중인 사람’이라며 또다시 거부(2011년 8월)했다. 서울행정법원(재판장 서태환)은 그해 11월 결국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손형근은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냈지만 각하돼 본안에 대한 판단은 받아보지도 못했다.

한통련에 대한 탄압 조짐은 그보다 2년 전에 나타났다. 이명박 정부 출범 2년째이던 2009년 4월 4·19 기념행사에 참석하려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그를 국정원이 느닷없이 막아섰다. 국정원은 그를 압수수색한 뒤 몇가지 조사를 하고는 이튿날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소환장을 건넸다. 그는 이를 거부한 채 다음날 출국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를 빌미로 2년 뒤 검찰(국정원)은 그를 기소중지했다. 하지만 그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9월 처음으로 서울에 온 뒤 5년여 동안 14차례나 조국을 오갔다.

―그 전 정부 때는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다가 이명박 정부 때 왜 갑자기 입국을 막았나?

“그때 공항에서 3시간 조사를 받았는데 북한에 가서 무엇을 했느냐, 북한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캐묻더라.”

그가 한통련 간부로서 행사차 북한에 간 것을 국정원이 뒤늦게 문제 삼았다. 손형근은 1996년 8월 ‘제7차 범민족대회’(평양), 2001년 8월 ‘민족통일대축전’(평양), 2008년 6월 ‘6·15선언 8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금강산)’에 참석하려 북한을 방문했다.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방문이었다. 세 행사 모두 남북한 및 국외 민간단체들이 공동으로 추진한 민족통일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민족 공동행사 때 한통련은 핵심이었다. 국내 단체나 인사들이 한국 정부의 거부로 방북하지 못할 때 외국에 있는 한통련이 남북한 단체를 연결하고 소통하는 구실을 했다.

―평양 방문은 다 공개 행사이고, 그 뒤에도 한국에 왔는데 왜 새삼 문제를 삼았나?

“국정원에서 집요하게 물어본 것은 1996년 방북 때 북쪽 판문점에서 있었던 집회 등이었다. 김일성 주석이 쓴 비석 앞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우리는 안내원이 가자고 하니까 손님 된 예의로 참가했다.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게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핑계이고, 실제로는 정권 출범 직후 광우병 촛불집회로 1년간 수세에 몰렸던 이명박 정부가 2009년 들어 공안통치를 시작하면서 한통련을 타깃으로 삼은 것 같다. 이명박 정부는 다시 북한과 대결정책을 취하고 있는데 남북 화해를 주장하는 세력이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한통련이 그런 정부를 국외에서 계속 반대할 것이라고 보고 다시 국내에 못 들어오도록 만들려고 문제 삼지 않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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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면한 디제이에게 서운”

한통련 회원은 박정희 정권 이후 과거 오랫동안 입국이 전면 금지됐다. 박정희 정권이 1977년 재일동포 유학생인 김정사 간첩사건을 조작했을 때 대법원이 한민통(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통련의 전신)을 반국가단체로 규정(1978년)한 것이 한통련을 옥죄는 가장 큰 족쇄로 작용했다. 당시 서울대 사회계열에 갓 입학했던 김정사(63)는 그가 존경하던 김지하 시인의 법정투쟁기 등을 같은 유학생 친구인 유성삼에게 빌려줬다가 보안사(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전신)에 잡혀갔다. 보안사는 김정사가 일본의 한 강연회에서 만났던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의 간부 임계성을 간첩 배후인물로 만들고, 임계성 뒤에는 한민통의 중심인물인 곽동의가 있다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꾸몄다. 김정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한민통은 졸지에 북한의 지령을 받는 반국가단체가 됐다. 그 뒤 법원은 자동적으로 ‘한민통(한통련)=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이때 한민통에 씌운 색깔은 1980년 당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사형수로 만드는 데 활용됐다. 5·17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일파가 내란음모 사건을 만들어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할 때 이유로 든 게 바로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의 수괴” 혐의였다. 김대중은 2004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색깔론에 휘말리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집권 5년 내내 한통련(1989년 한민통에서 이름을 바꿈)을 외면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보수세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사정을 우리는 이해했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그걸 모르니 ‘손 상, 한통련이 그렇게 김대중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는데 초청도 없습니까. 명예회복도 없습니까, 너무합니다’라며 놀라더라. 그런 게 서운하고 힘들었다”고 손형근은 말했다. 한통련의 입국이 전면 허용된 것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였다. 김대중은 퇴임한 뒤인 2004년에야 곽동의 등 한통련 인사들을 동교동 자택에서 31년 만에 만났다. 1970년대 초 강연회 때 먼발치에서 봤던 김대중을 손형근은 그때 처음으로 가까이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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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때 입국이 전면적으로 가능해졌을 때는 명예회복으로 받아들였을 것 같다.

“그렇다. 참여정부가 2003년 가을 한통련 회원에게 여권을 발급함으로써 사실상 한통련의 명예회복이 됐다고 봤다.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에서 공식적으로 명예회복을 시켜주는 일만 남았었다. 진화위에 한통련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요구를 우리가 했고, 진화위에서도 조사를 열심히 했다. 저도 여러차례 서울에 가서 증언했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기대했는데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 진화위원에 보수인사가 더 많아지면서 결국 진화위는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발생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 아니다’라며 한통련의 반국가단체 규정 사건을 기각했다. 그래도 여권은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나왔기에 설마 여권을 박탈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김정사씨가 2011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의 배후로 지목된 한통련을 반국가단체로 본 판단은 원인 무효로 보이는데 왜 법적인 명예회복이 안 되고 있나?

“원인 무효가 당연하다. 더구나 김정사씨 재심이 아니더라도 한통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던 근거 자체가 오래전에 무너졌다. 즉, 대법원이 1978년 한통련을 반국가단체로 판시하면서 든 근거의 하나가 곽동의 선생이 방북해서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주장인데 그가 방북했다는 기간에 도쿄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서류(한민통 회의록)를 통해 확인됐다. 그러나 법으로는 반국가단체라는 딱지를 뒤집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한통련이 직접 수사를 받거나 피의자가 된 적이 없어서 우리는 법원에 재심을 신청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법원이 잘못 판단했다고 스스로 판결을 바꿀 리도 없다.”

반국가단체 근거된 간첩사건 주인공
‘당국의 조작’ 확인돼 재심에서 무죄
원인무효에도 한통련 빨간딱지 여전


“‘대한민국 입장에서 통일운동’은
한통련 설립 이후 일관된 원칙
북한 지시·재정 지원 받은 적 없어”


내년 3·1절 귀국 때가 바로미터

반국가단체 낙인 때문에 한통련이 받는 불이익과 차별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여권 거부나 기한 축소는 여행 및 이동 자유에 대한 큰 제약이다. 한국 국적 재일동포들은 여권이 없으면 중국(일본과 중국의 협약에 따라 특별영주권자의 중국 입국은 가능)과 중국을 통한 북한 방문을 빼고는 기본적으로 다른 나라에 갈 수 없다. 또 사회단체로서 한국 정부와의 협력이나 공동사업을 할 수가 없으며, 일절 지원금을 받지 못한다. 독재정권과 결탁했던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매년 8억엔을 한국 정부에서 지원받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통련은 본국 지원금은커녕 활동 후원금 모금도 탄압받기 일쑤다. 한통련 기관지 <민족시보>나 한통련이 매해 주최하는 ‘통일마당’ 행사 팸플릿에 광고를 한 동포들을 영사관에서 불러 ‘반국가단체에 돈 내고 광고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올해는 없었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뒤인 지난해까지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손형근은 말했다.

―법·제도적으로 명예회복을 하지 못하면 정권에 따라 또다시 차별과 억압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점에서 한통련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국가보안법에 억눌려 있는 우리 조국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짐을 내리게 하는 것은 제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나라의 해방, 자유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굉장히 힘들겠지만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우선 내년 3·1절 100주년 공동행사가 서울에서 개최될 가능성이 높은데 한통련도 대표단을 파견할 계획이다. 그때 정부가 제 여권을 어떻게 할지 일단 지켜보려고 한다. 아마 국정원에서는 복잡하게 됐다고 생각할 거다. 저는 공항에서 조사받고 소환장도 받았으니 다른 사람은 돼도 이 사람은 안 된다고 국정원이 거부 핑계를 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남북 화해를 추구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로 보면 당연히 제 여권도 나올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정치적으로는 한통련이 다시 무죄이고 명예회복됐다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다. 그와 별도로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다시 제기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지난번 헌법 소원은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서 재외국민투표를 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한 문제제기였지만, 이번에 낸다면 1978년 재판 잘못으로 인한 한통련의 명예훼손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다른 하나의 해결책은 국가보안법 철폐다. 근거가 거기에 있으니 국보법에서 그런 항목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반국가단체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런 법적 해결은 안타깝게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오사카 출신의 재일동포 3세인 손형근은 1973년 창립 때부터 한민통(한통련)에서 활동했다. 스무살 무렵(1971년) 우리말을 배우기 위해 부친이 속한 오사카 민단을 찾았고, 민단은 산하단체인 한청에 그를 소개했다.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민단과 대립해 결별했던 한청은 1973년 한민통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손형근은 한청 오사카 본부 부위원장(1975년)과 한통련 중앙 조직국장(1995년)과 사무총장(2001년), 부의장(2004년)을 거쳐 2009년 3월 한통련 의장으로 선출됐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만들어 국내 반대파 탄압에 이용했지만 한민통은 처음부터 대한민국 지지를 분명히 했었다. 여러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3년 한민통을 만들 때 일본의 민주인사들에게 ‘대한민국 절대지지, 선 민주회복 후 통일, 조총련과는 연계하지 말 것’ 등 세가지 원칙을 제시해서 관철했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에 대한 한통련의 입장은 뭐였나?

“절대지지 그런 것은 아니고, 대한민국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통일운동도 대한민국 입장에 서서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그것은 한민통 설립 이후 지금까지 일관된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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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쓴소리 조용히 해와”

―독재에 반대했지, 대한민국을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다. 군사독재와 군사정권, 보수정권을 줄기차게 비판하고 반대하는 투쟁을 했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 등 민주정부에 대해서는 세차게 비판한 적이 없다.”

―민주정부라도 비판할 건 해야 하지 않나?

“하하. 좋으니까 비판 안 했다. 물론 민주정부도 여러 문제가 있지만 우리는 국외에 있다. 한국에 있으면 자기 생활에 영향도 주고,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있으니까 정부의 여러 정책에 대해 운동도 하고 의견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외국에 있는 우리는 큰 안목으로 우리 민족의 운명에 가장 관심이 있다. 그런 시선으로 볼 때 민주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거기에 대해서는 칭찬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영사관의 신원확인서에 있듯이 한국의 공안기관은 한통련과 총련이 매우 가깝다고 여긴다. 총련과의 관계는 어떤가?

“일본에 사니까 조총련과 개인적인 교류나 관계는 누구나 있다. 그러나 조직적으로는 별개의 사안이다.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만들었을 때도 범민련 일본지역본부(한통련), 범민련 조선인본부(총련)를 따로따로 만들어서 단체와 단체끼리 교류했다. 총련과는 그러한 공식적인 관계 외에는 특별한 게 없다.”

―한통련의 배후에 북한이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아직 있다. 북한과의 관계는 어떤가?

“북한의 지시나 재정적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 한통련은 아무 데도 종속되지 않는 어디까지나 자주적인 조직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가?

“북한에 대해 우리 조직 안에서 여러 의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북을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고, 싫어한다는 사람도 있고, 무관심한 사람도 있다. 조직 책임자로서 입장을 묻는다면 우리는 북한 역시 남한 민주정부처럼 대해왔다. 북한 내부적으로는 여러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대외적으로는 평화와 통일을 줄곧 얘기해왔기에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없다. 물론, 북한 인사를 만났을 때 개인적으로는 부자간의 권력 세습 등에 대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생각지 못할 일이라는 의견 등을 표명했다.”

―한통련은 남북한에 대해 제3자 위치에 있으니까 북에 대해서도 민주나 인권 등 보편적인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비유하자면 사돈집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공개적으로 공격적 비판을 안 하는 것과 같다. 사돈집에 가서 조용히 어찌 해야 좋지 않겠냐고 말하지 않나. 우리도 남의 민주정부나 북에 대해 문제가 있더라도 공개적으로 공격적으로 하면 안 되고, 내부적으로 어드바이스(조언)하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그렇게 해야 남북 양쪽에서 신뢰를 얻어서 가교 구실을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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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오사카 민단 간부

손형근은 어릴 때부터 일본 사회의 조선인 차별에 부딪치면서 민족의식에 눈떴다. 소(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일본 학생들한테 “조센징(조선인)은 돌아가라” “조센징은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등의 인종 차별을 당했다. 소학교 6학년 때 공중목욕탕에서 “조센징은 싫어”라고 한 일본인 친구와 몸싸움을 하다가 유리창이 깨져서 그 아이가 크게 다친 적도 있었다. 고교 졸업 때는 “대부분 회사는 조선인을 채용하지 않는다. 각오하라”는 소리를 담임 교사한테 듣기도 했다. 그런데도 대학에 들어갔지만 졸업해봐야 취직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결국 중퇴했다. 방황하던 그는 아버지 고향(경남 함안)이라도 가볼까 싶어 우리말을 공부하려고 아버지가 간부로 있던 오사카 민단에 찾아갔다. 민단의 한국어 강습회는 한청이 주관했다. “용서할 수 없는 차별을 당하면서 어린 나이에도 ‘우리나라가 통일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모두 죽는다’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떠올랐다. 그런 민족 차별 체험이 제 민족운동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그는 40여년간 ‘한통련 한길’을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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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통련 회원은 얼마나 되나?

“(재정) 지원해주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500명 정도다. 신문(민족시보)은 3천부 보내고 있다.”

―회원이 생각보다 적다. 줄고 있나?

“우리뿐 아니라 다른 단체들도 회원이 줄고 있다. 회원이 줄어드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 못 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의식을 높이려면 민족학교에 보내서 민족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민단계 동포들은 아이를 대부분 일본학교에 보낸다. 한국계 민족학교가 몇 있긴 해도 수업을 일본어로 하니까 학교를 졸업해도 우리말을 못하는 것도 문제다. 일본 전역에 총련계가 운영하는 조선학교가 100곳 정도 있는데 그들의 학교 운영 노하우나 민족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

―꼭 하고픈 말은?

“우리 민족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국 국민들이 많이 투쟁했고 고생했다. 우리 재일동포들 역시 많이 투쟁했다. 그 결과 한반도가 평화와 통일의 길로 가게 돼 같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물론 고비가 아직 남아 있고, 그 고비를 우리도 손잡고 넘었으면 좋겠다. 그런 과정을 함께하면서 저와 한통련이 누명을 벗고 명예회복을 해서 다시 한국에 웃으면서 가고 싶다.”

손형근의 가장 큰 바람은 재일동포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방학 때 본국과 재일동포 청소년들을 홈스테이 방식으로 교류시켜 서로의 문화를 체험하게 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대구 출신인 김지영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한통련의 복권이 먼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평화통일 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문재인 정부와 문 대통령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쿄/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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