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하도 요청해 간다했다”
측근 반대 불구 답방 굳힌 김정은
“태극기 부대 반대 괘념치 않아”
김여정 탔던 남한 KTX에 관심
대남 도발·위협에 싸늘해진 민심
억류 국민 석방 등 해법 찾아야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김정은 답방 위해 풀어야 할 숙제들
지난 9월 평양 공동선언에는 김정은의 서울 답방 약속이 담겼다. 맨 마지막인 6항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가까운 시일 내로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은 선언 발표 때 “가까운 시일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올해 안’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현재로서는 서울 방문을 미루거나 취소할 ‘특별한 사정’을 찾기 어렵다. 남북 공동으로 북한 철도 등에 대한 실태조사가 진행 중이고,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 철수와 도로 연결 같은 군사 긴장완화 조치도 속속 이어진다.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연기되고 미국의 대북제재 지속 의지가 재확인되는 국면이지만 판을 헝클어트릴 정도는 아니란 얘기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서울 답방과 관련해 주목되는 건 김정은이 남한 방문을 적극 희망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는 점이다. 평양 정상회담 당시 이른바 ‘태극기 부대’(보수 성향의 단체나 시위대)의 반대 움직임이 제기되자 김 위원장은 “그건 괘념치 않는다”라고 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동생이자 최측근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을 지난 2월 평창 겨울올림픽에 전격 파견한 것도 김정은의 관심을 엿보게 한다. 북한은 ‘남조선=적구(敵區)’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처럼 위험하다 여기는 지역에 피붙이를 보냈다는 건 그만큼 남한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의미다. 남한의 실정을 파악해 있는 그대로 보고하라는 뜻도 담긴 듯하다. 김정은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올리려 노심초사하는 간부들과 달리 김여정은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가감 없이 담은 ‘남조선 리포트’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김정은이 초고속열차인 KTX(Korea Train Express)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는 대목은 흥미롭다. 익명을 요구한 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인사는 “김정은 위원장이 KTX를 타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북측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김여정은 서울~평창 간을 KTX로 오가며 특사 일정을 치렀다. 여동생으로부터 한국의 KTX에 대해 보고받은 김 위원장은 “어떤 기술이 도입·적용됐고, 1㎞ 구간에 공사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등 관련 정보를 꼼꼼히 챙겨달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김 위원장은 2015년 6월 평양 순안공항 리모델링 현장을 찾아 “평양과 공항 사이에 고속철을 건설하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 당국자는 “10대 시절 스위스에서 유학하며 고속철인 TGV를 타고 파리 등지를 관광했던 경험이 작용하는 듯하다”고 풀이했다.
KTX에 대한 북한 측의 각별한 관심은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의 서울 방문 때도 확인됐다. 당시 장성택 당 제1부부장과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 등 일행은 KTX 경부선 구간에 올라 시속 300㎞를 돌파하자 일제히 손뼉을 치기도 했다. 동대문 쇼핑몰에선 “눈이 두 개밖에 없어 더 많이 볼 수 없는 게 안타깝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장성택은 조카인 김정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됐고, 박남기는 김정은이 주도했던 화폐개혁의 실패 책임을 물어 공개총살 당했다. 개방파의 몰락이라고 불릴만하다.
김정은은 ‘서울에 오면 환영받을 것’이란 우리 측 인사들의 독려에 “남조선에서 환대받을 만큼 제가 해놓은 게 없어서…”라며 자세를 낮췄다고 한다. 모처럼 제대로 된 북한 최고지도자의 현실 인식을 보는 듯하다. 사실 김정은 체제는 집권 이후 지난해 말까지 6년 동안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와 같은 시기를 보냈다. 핵·미사일 위협에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매설 같은 도발은 우리 국민들의 공분을 샀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자초했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전면에 나서 ‘서울 핵 불바다’ 발언을 쏟아내고, 대남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게 자충수였다. 개혁·개방 노선을 기대했던 우리 국민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다. 지난 1년 동안의 유화제스처 보다는 앞서 6년간의 도발과 위협이 더 김정은 체제의 실체와 가깝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게 사실이다.
이제 김정은 앞에는 ‘서울 답방’이란 허들이 가로놓여 있다.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넘지 못한 장애물이다. 김정은 언급대로 ‘태극기’ 시위대나 극소수 친북·찬양 세력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김정은의 서울 행보를 TV 생중계로 주시할 대다수 국민들의 여론 향배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서울행에 앞서 5년 넘게 강제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 등 우리 국민 6명을 돌려보내는 건 꼭 이행했으면 한다. 자신의 입으로 쏟아낸 대남 위협 발언에 대해서도 적정 수준의 유감 표시가 필요하다. 북핵 문제에 대한 전향적 메시지도 준비하면 좋겠다. 그래야만 서울로 오는 노정이 열릴 수 있다. 비단길은 아니더라도 가시밭을 면할 수 있는 방안이다. 어물쩍 넘기려다간 ‘최고존엄’에 생채기가 날 수 있고, 우물쭈물하다간 게도 구럭도 다 놓칠 수 있다.
정부도 김정은 맞이에 최선을 다하고, 지켜야할 대북원칙과 국민 여론도 챙겼으면 한다. 문 대통령은 “모든 국민이 정말 쌍수로 환영해 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지만 대통령과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는 더욱 중요하다. 김정은 답방이 또 한 번의 떠들썩한 이벤트가 아니라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향한 발걸음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