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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듣지 못해서, 보지 못해서, 알지 못해서…장애가 ‘죄’가 되는 곳, 법원·검찰·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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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조력 외면·수어통역 신청 거부

정당한 편의제공 현실에선 무기력

죄 더 커지거나, 피해 축소 되풀이

경향신문

지적장애 3급 ㄱ씨는 지난 7월 ‘대포통장 사기단’에서 돈을 인출하는 심부름을 하다 사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과 검찰은 ㄱ씨가 지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사 때 “비교적 일상적인 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진술조력인이나 신뢰관계인을 동석시키지 않았다. 동석을 요청하라고 ㄱ씨에게 알려준 이도 없었다. ㄱ씨 부모도 지적장애인이라 자식의 진술을 도와주지 못했다. ㄱ씨는 비장애인처럼 조사를 받았다. 공소장에도 ㄱ씨의 장애는 기록되지 않았다. 재판 때 판사가 ㄱ씨에게 직접 장애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발달장애 1급 ㄴ씨는 지난해 9월 길거리에서 옆을 지나던 사람을 밀쳐 폭행 혐의로 경찰에 연행됐다. ㄴ씨 부모가 신뢰관계인으로 아들의 진술을 도와주려 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경찰이 부모를 조사실에서 내보냈기 때문이다. 조사가 끝나고 경찰이 작성한 조서를 본 부모는 지적 능력이 3~4세 수준인 아들의 진술이라고 보기 어려운 말이 적힌 것을 확인했다. 부모는 “우리 아이가 하기 힘든 말”이라며 항의했다. 경찰은 “도장을 찍지 않으면 아들에게 불리하다”고 했다. ㄴ씨는 조서 내용과 자신의 진술이 같음을 확인하는 손도장을 찍었다. 이후 피해자는 ㄴ씨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까지 제기했다. 소송은 기각됐지만 재판 기간 ㄴ씨는 의사소통이 힘들어 괴로움을 겪었다.

형사소송법 제244조 5항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전달할 능력이 미약한 경우 신뢰관계인이 동석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다만 의무 사항이 아니다 보니 실제 검경 조사 현장에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다. 재판 과정에서도 법률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경향신문이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의 상담 사례를 살펴본 결과 시각장애, 청각장애, 발달장애 등 장애 특성에 대한 사법당국의 이해가 부족했다. 장애인도 자신의 권리에 대해 잘 몰랐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사법·행정절차 및 서비스 제공에서 장애로 인한 제한·배제·분리·거부 행위를 금지한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6조 6항은 사법기관의 정당한 편의제공을 규정한다. 경찰·검찰·법원이 장애인 피해자 및 피의자, 참고인의 법률지원 신청을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면 차별에 해당한다. 편의에는 보조인력, 점자자료, 인쇄물음성출력기기, 수어통역, 대독(代讀), 음성지원시스템, 컴퓨터 등이 포함된다. 장애인의 권리는 법률에 있지만 현실에는 없다. 권리를 알려주지 않으니 스스로 알아서 법률지원을 신청해야 한다.

■ 장애인 전담부서 설치 권고했지만 ‘미지수’

법률지원을 신청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청각장애 2급 ㄷ씨는 서울가정법원에서 이혼소송을 하며 지난해 11월, 올해 1월과 6월 3차례에 걸쳐 장애인사법지원과 청각장애인 수어통역 지원을 신청했다. 법원은 “가사사건의 경우 소송비용이 자비부담원칙이고 필담 등으로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다”며 지원을 거부했다. 가사소송규칙 제4조는 여비·일당·숙박료 및 감정인·통역인 등에 대한 보수를 신청 당사자가 내도록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7월쯤 ㄷ씨에게 수어통역 지원에 대한 예납금 60만원을 내라고 명령했다. ㄷ씨는 수어통역에 대해 국비지원을 받기 위해선 소송구조를 신청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자격요건을 확인했지만 장애인연금 수급자가 아니라 해당되지 않았다. ㄷ씨는 60만원을 내고 수어통역인을 참여시킬 수밖에 없었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김재왕 변호사는 “의사소통이 어려운 발달장애인은 법률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제도 자체를 잘 몰라 대부분 신청하지 않는다. 장애인이 수사기관에서 진술조력인이나 신뢰관계인의 지원을 받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경찰·검찰·법원이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장애인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9월 대검찰청 산하 검찰개혁위원회는 문무일 검찰총장에게 장애인 진술조력을 의무화하고 장애인 폭력사건 전담검사·수사반을 설치하라고 권고했다. 같은 달 대법원 자문기구인 사법발전위원회도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법률 분쟁을 겪을 때 종합적인 사법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법접근센터’를 설치하는 권고안을 채택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최근 “수어통역비처럼 비장애인에게 발생하지 않았을 비용을 장애인에게 부담하게 한다면 동등한 수준의 사법 절차 및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며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규칙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권고는 강제력이 없어 실제로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법적 절차는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장애인의 특성이 무시되면서 가해자인 경우 죄가 더 커지고, 피해자인 경우 피해가 축소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장애인에 대한 법률지원 지침을 현실 상황에 맞게 개선하고 일선 경찰·검사·판사도 업무에 제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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