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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라테 한 잔 0.00061911 비트코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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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선진국 싱가포르는 지금

현금 대신 비트코인 결제 늘어

상가 곳곳에 전용 ATM기 설치

안 되는 것만 열거한 네거티브 규제

사업 환경 좋아지자 각국 업체 몰려

중앙일보

6일 싱가포르 오차드 로드의 한 가게 앞에 ’암호화폐를 현금 교환 또는 매매할 수 있는 ATM 기계가 있다“는 내용의 알림판이 세워져 있다. [이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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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61911 비트코인입니다.” 싱가포르 로빈슨 로드에 위치한 두카투스(Ducatus) 카페에서 차이라테를 주문한 기자에게 매니저 무스가 제시한 가격이다. 4.05싱가포르달러인 음료 가격을 동일한 가치의 비트코인으로 환산한 수치다.

지난 7일 기자가 방문한 이 카페에서는 이처럼 암호화폐가 자유롭게 사용되고 있었다. 싱가포르에는 암호화폐를 결제수단으로 사용하는 호텔과 카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암호화폐를 현금으로 교환해 주는 암호화폐 ATM까지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암호화폐 선진국’의 위력을 싱가포르 현지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ICO(암호화폐 공개)에 관한 한 싱가포르는 세계 1위 국가다. 국제 암호화폐 분석 사이트인 ‘ICO레이팅(ICORATING)’에 따르면 싱가포르에서는 올해 3분기 세계에서 가장 많은 46개의 ICO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성공 비결이 뭘까. 전문가들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몇 가지 정해 놓고 나머지는 모두 허용한, 이른바 ‘네거티브 규제’를 철저하게 시행했다는 점을 첫손에 꼽고 있다.

싱가포르는 암호화폐 및 ICO와 관련해 법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싱가포르 통화청(Monetary Authority of Singapore·MAS)이 제정한 암호화폐와 ICO 관련 가이드라인은 돈세탁 금지, 증권형 토큰(보유 자산을 암호화폐화한 것) 발행 금지 등과 같이 금지사항에 대한 규제를 촘촘하게 만들어놨다.

이를 어기면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ICO 때 공개해야 하는 백서를 왜곡하거나 조작하면 최대 징역 7년형까지 받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간섭은 여기까지다. 하지 말라는 것만 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용된다.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인 업비트 싱가포르 법인의 김국현 대표는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에 대한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있어 좋다. 성장하고자 하는 업체들이 마음 놓고 싱가포르에서 새 도전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업체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이다. 국무조정실, 금융위원회, 법무부 등으로 담당 부처가 나뉘어 있어 담당자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한국과 달리 싱가포르는 MAS로 창구를 일원화했다. 김 대표는 “싱가포르의 MAS 당국자들은 업계와 활발하게 미팅하면서 무엇을 허용하고 금지할 것인지 명확하게 알려준다. 싱가포르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업비트도 MAS 당국자와 벌써 수차례 만났을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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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카투스 카페는 자체 암호화폐인 ‘두카투스’를 사용하는 고객에게 15% 할인 혜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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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최초의 암호화폐 오프라인 매장인 두카투스 카페는 암호화폐 선진국 싱가포르를 제대로 체험하게 해 주는 상징적 존재다. 카페 내부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암호화폐 가격이 커다란 모니터 두 개에 표시돼 있어 마치 증권거래소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차이라테를 주문한 기자는 “현금을 받지 않는다”는 말에 스마트폰을 꺼내 미리 충전해 둔 비트코인 전자지갑을 내밀었다. 매니저 무스는 기자의 전자지갑에서 4.05싱가포르달러의 비트코인 환산액인 ‘0.00061911’을 입력하고 카페의 비트코인 전자지갑 QR코드를 스캔한 뒤 ‘Send(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카페의 전자지갑을 ‘새로고침’하자 0.00061911 비트코인을 받았다는 내역이 표시됐다.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1987호텔도 11월 초부터 비트코인·이더리움 등 암호화폐로 숙박비와 바 이용료 등을 결제할 수 있도록 했다. 싱가포르 주요 상점가에는 암호화폐를 현금으로 변환할 수 있는 ‘암호화폐 ATM’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비트코인 ATM을 운영하는 ‘비트코인 익스체인지(Bitcoin Exchange)’ 대표 피터 후인은 “싱가포르에서 비트코인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늘어 ATM 등 관련 거래 업체도 늘어나는 추세”라며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암호화폐를 사러 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암호화폐·블록체인 산업 키우면서 일자리 확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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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카투스 카페의 암호화폐 충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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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주목할 대목은 암호화폐가 새로운 수익과 시장,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암호화폐와 관련한 싱가포르의 개방성은 각국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업체들을 싱가포르로 불러 모으고 있다. 정부 측에서 공식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이들 업체의 법인세만으로도 상당한 세수를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자연스럽게 암호화폐와 관련된 새로운 산업 생태계가 형성됐다. 암호화폐 시장이 새로 형성되면서 IT 기술 업체뿐 아니라 암호화폐 전문 컨설팅 회사와 법률사무소 등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관련 일자리도 당연히 증가하고 있다.

피터 후인은 “기술자뿐만 아니라 회계사, 서무 담당자 등 필요 인력들이 증가해 계속 새로운 사람들을 뽑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반영하듯 업체 현관에는 채용 중(Now Hiring)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업비트 싱가포르 법인의 현지인 인력인 아즈만 하미드 수석은 “정부가 청년 일자리 부족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산업이 커지면서 청년 일자리가 많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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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익스체인지’ 사무실에 있는 비트코인 ATM 기계. 싱가포르 달러로 비트코인 등의 암호화폐를 사거나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다. [이후연 기자]


싱가포르 정부는 현재 야심 찬 후속 조치들을 속속 추진 중이다. 우빈(UBIN)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증권 등 디지털 자산을 암호화폐화(化)해 실시간으로 대금 결제와 실물 인수가 이뤄지도록 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조만간 싱가포르 중앙은행에서 싱가포르달러를 암호화폐화해 국가 간 결제가 가능하도록 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반면 한국 정부는 여전히 암호화폐 전면 금지 기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 ICO 불허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외로 진출한 암호화폐 거래소로의 송금까지도 사실상 금지하고 있다. 송금을 담당하는 은행들이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암호화폐 업체의 해외송금을 승인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변호사협회가 “정부가 은행을 통해 암호화폐 거래소와 이용자들의 거래를 막는 행위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철회할 것을 요구할 정도다.

한국의 상황을 들려줬더니 “세계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싱가포르에서 암호화폐 투자 펀드를 운영하는 존 응 팡일리난 시그넘 캐피털(SIGNUM CAPITAL) 대표는 “한국은 지나치게 자국 안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이미 각국 정부와 금융 시장이 암호화폐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는데, 지금 막아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따라갈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투자자 보호에 더 큰 역점을 두고 있어서 그렇다”고 설명하자 그는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기술에 투자하는 것은 투자자가 판단해야 하는 개인의 몫”이라며 “정부는 불법 및 위법성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관련 생태계가 더 좋은 방향으로 커 나갈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 주면 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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