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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우리는 어린이 돼지 사양가, 우리에게 돼지는 경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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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충남 홍성군 결성면의 마을학교가 운영 중인 ‘돼지와 경제’ 수업을 통해 결성초 4~6학년 어린이들은 ‘돼지 사양가’가 되었다. 지난 7일 방목장에서 어린이 사양가들이 함께 돼지를 돌보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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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 결성마을학교의 특별한 수업 ‘돼지와 경제’

도시의 사교육으로는 배우지 못할 것들을 지역주민에게 배우는 결성초등학교 학생들

반려동물 아닌 ‘경제동물’ 돼지에게 사료를 주고 똥을 치워준다

“키워 사고파는 것 배우다보니 경제가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느껴요”

다음달 도축 앞둔 돼지들…생명의 존엄성 ‘딜레마’까지 아이들에겐 배움이다


독특한 축산업자를 만났다. 기자의 명함을 받더니 그는 자신의 명함 5~6장을 부채꼴 모양으로 펼쳤다. 한 장을 뽑아보니 명함에 쓰여진 글자는 ‘꽝’. “제대로 된 명함을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새로 내민 명함도 ‘꽝’. 그는 웃음을 못 참겠다는 얼굴로 기자의 표정을 관찰했다. 옥신각신 끝에 진짜 명함을 받았다. ‘4학년 1반 2번 어린이 돼지 사양가 김재현’. 김군은 흑돼지인 버크셔 한 마리를 방목하는 진짜 ‘사양가’다. 사양가는 소나 돼지 등 가축을 키워 시장에 공급하는 이를 말한다.

‘어린이 돼지 사양가’들을 만나기 위해 지난 7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을 찾았다. 아침에 약간의 비가 지나간 덕에 아름드리 나무의 붉은 단풍잎은 빗물을 머금고 있었다. 널찍한 밭에 도열한 배추가 초록빛을, 고층건물이 없어 뻥 뚫린 하늘은 푸른빛을 더했다. 오후 2시가 되자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7명의 아이들, 아니 ‘어린이 돼지 사양가’들이 나타나 결성면 복지회관의 문을 열었다. 이날은 마을학교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충남 홍성군 결성면의 마을학교는 지난 9월 ‘개교’했다. 결성면의 유일한 초등학교인 결성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역주민들이 일종의 ‘방과후 수업’을 한다. 결성초는 1911년 세워진 오랜 역사의 학교지만 지금은 내년에 입학할 1학년생을 찾지 못해 폐교 위기에 놓여 있다. 결성면 주민인 장동소 마을학교 교장(45)은 “애초 행복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마을학교를 생각했지만 올봄 결성중학교까지 폐교되는 것을 보면서 초등학교만은 없어지지 않도록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학교 수업도 “도시의 사교육으로는 쉽게 배우지 못할 내용으로 채웠다”고 한다.

‘돼지와 경제’는 결성면 마을학교가 4~6학년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수업 중 하나다. 17년간 금융권에서 일하다 지금은 결성면에서 7000여마리의 돼지를 키우는 이도헌 성우농업 대표(50), 결성면 원천마을이 ‘농촌생태대안마을’이 되는 과정을 책으로 쓰고 있는 서은경 작가가 교육을 한다. 약 3개월간 8번 진행되는 수업 프로그램은 서 작가가 기획했다. 수업의 핵심은 아이들이 ‘돼지 사양가’가 되어보는 것. 그렇게 해서 김은지(10), 김재현(10), 최형석(10), 이현우(11), 박준빈(12), 이다솔(12), 장경준(12) 등 7명의 전국 최초(?) 어린이 돼지 사양가들이 탄생했다.

이날 마을학교 장동소 교장은 어린이 사양가들과 ‘담판’을 지을 일이 있었다. 아이들은 9월19일부터 8마리의 버크셔 흑돼지를 방목장에서 키우고 있다. 수업은 1~2주에 한 번씩 열리고, 이때마다 사양가들이 흑돼지의 똥을 치우고 사료를 줬다. 문제는 수업이 없는 날 돼지를 돌보는 일이었다. 2주 전 수업시간에 아이들은 ‘공동사육’의 원칙 아래 각자 요일을 정해 방목장에 들르기로 했다. 어기면 벌금을 내야 한다.

장 교장이 진지하게 운을 뗐다. “얘들아, 여기 돼지 누구 거야?” 어린이 사양가들이 당당하게 외쳤다. “우리 거요.” “근데 왜 교장선생님이 힘든 거지? 너희들이 없는 동안 교장선생님이 똥 치우고 물 주고 사료 줬어.”

사양가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재치 있는 한 어린이 사양가가 두 손을 곱게 포개고 90도로 인사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벌금을 내지 않으려는 꼼수였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은 어물쩍 넘어가지 않았다. “약속대로 와서 일했던 사람 누구지?” 박준빈 사양가만 “저요!”라며 손을 들었다. 김은지 사양가는 조금 억울한 듯 말했다. “저는 오려고 했는데 엄마가….” 이날 수업을 참관하러 온 은지 어머니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지가 ‘약속 지켜야 한다’고 계속 그랬는데 제가 시간이 없어서 못 왔거든요.” 은지네 집에서 방목장까지는 꽤 걸어야 하는 데다 길이 외져 어머니 입장에선 열 살짜리 딸을 홀로 보내기가 망설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 거래는 거래다. 아무도 돼지를 보러 오지 않은 날엔 장 교장이 ‘위탁 사육’을 해 준 셈이니, 약속대로 준빈이를 빼고 모두 벌금을 내야 한다. 벌금은 어린이 사양가들을 위해 만든 가상통화 꿀(1꿀=1000원)로 낸다. 지난 9월 어린이 사양가들은 마을학교가 만든 가상은행인 ‘돼지은행’에서 500꿀을 대출받았고 그중 200꿀로 돼지 한 마리씩을 샀다. 매주 12꿀의 사료값도 내고 있다. 공동사육의 약속을 어기고 순번을 지키지 않은 이들이 내야 하는 벌금은 주당 15꿀이다. 대출빚은 각자 키운 돼지를 출하해 돈을 번 후 갚게 한다.

‘정산’이 끝나고 드디어 어린이 사양가들이 방목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방목장은 1785㎡(540평) 규모로 8마리의 돼지들에겐 꽤 넓은 공간이다. 방목장에 처음 들어간 날 어린이 사양가들은 호루라기를 불어 돼지들을 불러모았다. 하지만 이제 돼지들이 아이들을 알아보고 먼저 다가온다. 장난기 많은 아이들은 돼지를 마주 보고 마구 뛰었다. 약 80㎏에 이르는, 아이들 덩치의 두 배만 한 돼지들이 ‘나 살려라’식으로 달렸다. “와, 그새 살이 많이 쪘네.” “내 돼지는 마른 것 같은데?” “내 돼지는 얼굴이 까매졌어.” 어린이 사양가들은 각자가 사들인 돼지의 상태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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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 결성면 마을학교의 ‘돼지와 경제’ 1교시는 경제지식을 배우는 시간이다. 수업의 기획자이자 ‘훈장’인 서은경 작가가 각국의 화폐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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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경제’ 수업을 진행하는 서은경·이도헌씨는 돼지가 반려동물이 아닌 ‘경제동물’이라고 가르치고 이름을 짓지 않게 했다. 아이들은 귀에 달린 번호로 자신의 돼지를 파악했다. 지도에 따라 아이들은 각자 산 사료 포대를 뜯어 급이기(돼지먹이통)에 부었다. 돼지들이 모여들어 원형 사료통에 머리를 맞대고 사료를 먹었다. 배가 부른 돼지들은 다시 방목장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실컷 뛰논 아이들은 이번엔 돼지의 똥을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더러운데 괜찮아?” 하고 물으니 수업에 적극적인 은지가 “이게 다 돈이에요”라고 씩씩하게 답했다. 어린이 사양가들은 돼지 똥을 한 봉지씩 담아오면 5꿀을 받는다. 똥을 치우지 않으면 벌금 3꿀을 내야 한다. 교사들은 방목장에서 누가 돼지똥을 제대로 치워 오는지를 관찰한다. 정산은 다음 시간에 이뤄진다. 돼지똥을 치우다가 그만 얼굴에 묻힌 아이도 있었다. 친구들은 킥킥대며 놀려댔다.

똥을 모아 올 경우 5꿀을 지급하는 이유는 환경을 생각하자는 이도헌 대표의 철학 때문이다. 이 대표는 이번 수업을 통해 돼지똥이 골칫거리가 아니라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돼지똥과 오줌은 마을에 냄새를 피우는 데다, 토양의 질과 수질을 악화시킨다. 하지만 ‘바이오가스 플랜트’를 세우면 똥의 메탄가스를 이용해 전기를 만들 수 있다. 아이들이 모은 돼지똥은 곧 바이오가스 플랜트 사업자가 와서 사갈 예정이다. 이 대표는 내년에 자신의 돼지축사 옆에 바이오가스 플랜트를 지어 그 에너지로 유리온실에서 딸기 등의 작물을 키우려 한다.

모두가 화폐(꿀)가 되는 똥 담기에 여념이 없는 사이, 현우와 형석이는 돌을 줍고 있었다. 돼지들이 편하게 돌아다니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돌덩이 옮기는 건 돈이 되지 않지만, 선생님이 “똥을 치우면서 돌덩이들도 한곳에 옮겨주면 더 좋겠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지는 미처 똥을 다 치우지 못한 친구의 똥까지 주워주고 있었다. ‘친구한테 1꿀이라도 받으라’고 ‘이해타산’을 따져줬더니 “친구니까 괜찮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들이 똥을 치우는 사이, 이다솔 사양가는 목장에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울타리를 기웃거렸다. “저는 돼지가 조금 무서워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다솔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울타리 바깥에서 호스를 대 돼지들의 물통에 물을 부어주었다. 그의 두려움을 이해한 친구들은 다솔이 몫의 똥까지 치워줬다. 다솔이는 어디에선가 푸성귀를 가져와 울타리 바깥에서 돼지에게 먹으라는 듯 내밀었다. 돼지와 눈을 맞추며 바라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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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마리의 흑돼지들은 다음달이면 도축되어 ‘고기’가 된다. 서울의 대형마트에 진열되고 레스토랑에 팔려나간다. 교사들은 직접 키운 돼지로 만든 음식을 아이들에게 시식하게 할 예정이다. 그때 아이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축산 1번지 홍성에서 자라선지 “괜찮아요”라고 ‘쿨’하게 대답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다만 은지는 ‘계속 번식시키겠다’며 도축을 반대할 것이라고 했다. 은지는 “방목장의 돼지들이 행복해 보여서, 언젠가 대목장을 짓고 싶다”고 했다. 대목장을 짓기 위한 돈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를 물으니 잠시 고민 끝에 “음…, 그럼 몇마리는 팔아야겠네요”하고 웃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정육점을 하는 현우는 레스토랑을 갖는 게 꿈이다. 직접 고기요리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 키운 돼지들로 요리를 해보겠냐고 했더니 “그건 좀…, 제가 키운 건 못 먹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는 “돼지를 쓰다듬을 때의 부드러웠던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고 했다. 만화가가 꿈이라는 형석이는 “돼지를 주제로 만화를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교사가 꿈인 경준이는 “돼지를 키워 사고파는 것에 대해 배우다보니 ‘경제라는 것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며 “돼지를 잘 키워야겠다는 책임감, 조금 무서웠던 돼지와 친해지는 과정을 통해 용기도 배웠다”고 했다.

대개의 아이들은 금전출납부 작성법, 화폐의 기능 등에 대해 배우는 1교시 수업보다는 방목장에서 뛰노는 2교시 수업을 좋아한다. 하지만 준빈이는 1교시 수업도 귀를 쫑긋하고 듣는 편이다. 돼지를 팔아 대출빚(500꿀)을 갚고나면 남는 돈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교사의 질문에 준빈이는 “저축을 하겠다”고 했다. 이도헌 대표가 “돈을 모은 다음에 바로 돼지를 사면 안돼, 돼지가 쌀 때 사야 하는 거야”라고 하자, 준빈이는 “시세가 중요해요!”라고 외쳤다. 금융권에서 일한 이도헌 대표는 준빈이가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스타일임을 간파했다. 반면 은지는 돼지를 번식시켜 대목장을 짓겠다고 하니, 위험도 불사하는 사업가 스타일이다. ‘돼지와 경제’ 수업의 구호는 ‘돼지통, 돼지창, 돼지통창’이다. 모든 것을 돼지를 통해 바라보자는 의미다. 아이들은 자신도 몰랐던 개성을 사양가가 되어보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발견하고 있었다.

도시의 아이들은 돼지를 ‘제품’으로 만날 뿐이다. 스스로 돼지를 키워 고기로 유통시키는 체험은 어린이 사양가들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까. 수업을 기획한 서 작가가 말했다.

“도시 사람들은 생산지와 단절돼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사육과정, 도축과정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축산농가의 책임으로 돌리고 혐오하죠. 정작 돼지고기를 사 먹을 때는 가성비를 따지면서. 소비자가 가성비를 따질수록 위생이나 시설에 투자를 할 수가 없는데도요.”

서 작가와 이 대표는 아이들에게 도축 현장은 보여주지 않을 계획이지만, 인간이 옛날옛적부터 다른 생명을 영양분으로 취하기 위해 도축을 할 때 기도를 드리는 등 일종의 의식을 거쳤다는 점을 가르칠 계획이다. 이들은 “12월이 되면 아이들은 사양가에게 생명을 내어준 그 고마운 동물들이 어떻게 하면 더 안전하고 행복한 환경에서 살다가 갈지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생명의 존엄성을 배우면서도, 잡식동물로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을 해쳐야 한다는 딜레마 속에 놓여 있다. 12월, 그간 정을 쌓은 돼지가 도축되고 고기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어린이 사양가들은 그 ‘딜레마’를 절절히 느끼게 될 것이다. 도시에서 책으로만 돼지를 접하는 아이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미묘한 감정과 생각에 휩싸일 것이고, 저마다 견해가 생길 것이다. 축산농가가 밀집한 홍성군 결성면의 아이들은 이렇게 한 뼘씩 자라고 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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