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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사건 보도 '조심, 또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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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며칠 전 포털사이트에 심상찮은 실시간 검색어가 올라왔다. '이수역 폭행.' 뭔가 큰 사건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녀가 얽힌 폭행 사건이 점점 성(性) 대결 양상을 보이며 파장이 커지고 있었다. 거기다 다툼 상황을 찍은 영상까지 공개되며 사태가 일파만파 커졌다. 언론에서도 앞다퉈 보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럴 때 아차 하면 실수가 벌어진다. 보도 경쟁을 벌이다 보면 본질은 사라지고 마녀사냥식 속칭 '신상 털기'의 빌미를 언론이 제공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제작진이 가장 고민하는 화두는 '2차 피해 방지'이다. 무신경하게 붙인 사건 이름이나 보도 내용에 피해자가 재차 피해를 보는 일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아동성폭행범 '조두순 사건'만 해도, 처음에는 피해 아동을 연상케 하는 이름으로 알려져 범인보다 피해자가 더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래서 이제는 사건 초기부터 작가와 PD가 호칭부터 정리한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김, 이, 박 등 성(姓)만 부르는 것인데, 간혹 이것도 곤란할 때가 있다. 특이한 성은 단박에 누군지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알파벳을 쓰기도 하는데, J씨나 H씨 등 진짜 성의 이니셜을 쓰지 않고 알파벳 순서대로 A, B로 써야 조금이라도 더 신분 노출을 막을 수 있다.

피해자 위치 노출도 걱정이다. 가령 현장 영상을 사용하다 보면 아파트나 빌라 이름이 그대로 비칠 때가 있다. 만약 피해자가 아직 그곳에 살고 있다면 쉽게 위치를 알아낼 수 있게 된다. 깨알같이 보이는 이름이라도 철저히 모자이크를 해야 한다. 또 작은 시골 마을이라면 동네 이름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를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도(道)나 시(市)까지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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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을 상세히 묘사하는 것도 금기 사항이다. 범행 도구, 범인이 당시 했던 행동 등 단순한 호기심으로 말하는 내용이 피해자에겐 다시 한 번 범행 상황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무신경해서, 또는 시청률 욕심에 경쟁적으로 보도하다가 벌어지는 '2차 피해'다. 제작진은 이를 막기 위해 오늘도 마음속으로 '조심, 또 조심'을 되뇌며 방송을 만든다.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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