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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매경포럼] 말 한마디 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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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국내 최초로 '영리병원'이 제주에서 문을 열려다가 표류하고 있다고 한다. 일단 당황스럽다. '국내 최초의 영리병원'이 이제야 등장한다면 그럼 우리 동네에 있는 안과, 치과, 소아과병원은 모두 비영리병원이냐는 의문부터 든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국세청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개업한 의사의 평균 연봉은 2억3000만원이다. 이들 중 상위 10%의 연봉은 평균 8억9000만원이라고 한다. 비영리활동으로 이런 돈을 벌고 있다고 표현해야 한다면 이는 언어의 혼란이다.

동네 병원들이 건강보험 수가를 통해 일일이 진찰비, 치료비를 통제받기 때문에 공익성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 주변의 안과, 치과, 소아과병원 등이 영리병원이라는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돈을 벌 수 없는데 병원을 개설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대학병원도 마찬가지다. 연세대의료원은 지난해 3000억원에 이르는 의료이익을 냈고, 서울대병원도 100억원대 이익을 실현했다.

이런 마당에 제주녹지국제병원에 '국내 최초의 영리병원'이라는 덫을 씌우는 것은 어색하다. 이 병원은 김대중정부가 2002년 경제자유구역에서 병원에 외국 자본이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한 뒤 그 법률에 따라 정부 허가를 받아 지난해 7월 처음 완공된 병원이다. 그 특징을 따져 보니 영리·비영리 구분보다는 '투자 개방형 병원'이나 '건강보험 제외 병원'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해 보인다. 이런 명칭을 사용했더라도 "환자 치료보다 이윤만 추구하면서 의료 공공성을 약화시킬 병원"이라는 반발 목소리가 지금처럼 컸을지 궁금하다. "기업 투자로 의료시설이 개선되고 건강보험 제약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장점이 조금이라도 더 부각되지 않았을까.

'언어의 마술'이 신비롭다. 몇 달 전 이 난에 칼럼을 내보낸 뒤 기사 정정을 요구하는 이메일을 받았다. '꿀 먹은 벙어리 행세'라는 표현이 포함돼 있었는데 그것을 고쳐 달라는 요구였다.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기는 해도 장애인과 장애에 부정적인 인식을 줄 수 있으니 '입은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형세'로 바꿔달라고 했다. 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가 이런 용어 수정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여 있었다.

'말 한마디'를 바꾸려는 노력은 알고 보니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사회적 편견과 거부감을 바로잡는다는 취지에서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은 7년 전 이미 조현병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됐다. 헌병은 창설 70년 만에 '군사경찰'로 이름을 바꾼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유래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해소하고 업무 성격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군인사법 시행령까지 개정하는 노력이 가상하다. 최근에는 가족 호칭을 수정해야 한다는 여성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으니 지켜볼 일이다. 남편의 남동생에게 도련님, 여동생에게는 아가씨라고 부르는 호칭 자체에 남성 우위 문화가 들어 있어 성차별적이라는 주장이다.

'영리병원'이라는 단어가 개념 혼란을 가져와서 불만이라면 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교육으로 이어지는 '무상 시리즈'는 또 다른 차원에서 불만이다. 공짜로 퍼주는 포퓰리즘은 한번 맛을 들이면 영원히 빠져나오기 힘든 늪이라고 한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그냥 나왔겠는가. 오죽하면 "포퓰리즘 정권을 밀어낼 수 있는 것은 더 강력한 포퓰리즘 정권뿐"이라는 말도 있을 지경이다.

우리나라에 10년 전 무상급식이 도입된 이후 이제는 그 범위가 무상보육, 무상교육, 무상교복 등으로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이런 공약으로 표를 긁어모으는데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생색은 퍼주는 정치인들이 내고 결국은 국민들이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정치인들이 더 큰 생색을 낼수록 국민들의 세금 부담은 더 커지게 된다. 빈손으로는 무상급식도 무상교육도 할 수 없다.

'혈세'라는 단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금에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를 보여준다. 중국과 일본도 한자문화권이지만 혈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세금을 피처럼 소중하게 생각해 온 우리 국민들이 그 피 같은 세금을 교육과 급식에 쏟아부으면서 '무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국민교육·국민급식이라거나 혈세교육·혈세급식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최경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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