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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기자칼럼]야구기자 하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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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야구는 미국에서 먼저 끝났다. 월드시리즈에서 LA 다저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만났다. 동·서부를 대표하는 인기 구단의 맞대결은 1916년 이후 102년 만이었다.

다저스의 감독 데이브 로버츠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태어났다. 흑인 미군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뒀다. 보스턴 감독 알렉스 코라 역시 미국이 아닌 푸에르토리코에서 출생했다. 월드시리즈는 114회째를 맞았지만 ‘마이너리티 감독’끼리의 맞대결은 처음이었다. 로버츠 감독은 “모든 소수자들에게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대결이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코라 감독은 푸에르토리코 출신 감독으로 처음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더구나 2018시즌이 감독 데뷔 시즌이었다. 휴스턴 벤치 코치를 거쳐 이번 시즌을 앞두고 보스턴과 계약했다. 연봉이 80만달러로 메이저리그 감독 중 가장 적은 축에 속한다. 코라 감독은 보스턴과 감독 계약 때 인센티브 등 이런저런 부가 조건을 요청하지 않았다. 딱 한 가지 조건만 내세웠다. “내 고향에 수송기 한 대분의 구호물자만 보내주면 된다”고 했다.

코라 감독이 계약하기 직전이었던 2017년 9월, 푸에르토리코는 허리케인 마리아가 할퀴고 가는 바람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피해규모 자체가 제대로 집계되지 않을 정도였다. 당초 미국 정부에서 발표한 공식 사망자는 64명이었지만 지난 5월 하버드대 조사팀이 현지 방문 조사를 한 결과, 허리케인 마리아 때문에 숨진 주민 수가 무려 4645명이나 된 것으로 드러났다. 재산 피해 규모도 97조원 수준으로 파악됐다.

월드시리즈는 치열했다. 3차전은 연장 18회까지 치러졌다. 다저스가 맥스 먼시의 끝내기 홈런으로 이겼다. 2승1패를 하고도 보스턴 선수들이 1승2패인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코라 감독은 라커룸에서 “우리가 약해서 18회 끝에 진 것이 아니라 상대가 우리를 이기려면 18이닝이나 필요했던 것”이라고 격려했다. 보스턴 선수들이 힘을 되찾았다. 4차전 0-4로 뒤진 경기를 뒤집어 이겼고 4승1패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따냈다. 코라 감독은 우승 트로피를 들고 보스턴 구단 관계자들과 함께 푸에르토리코를 방문했다.

다저스는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준우승에 머물렀다. 팬들은 ‘패장’ 로버츠 감독을 향해 야유를 보냈다. 구단은 해고 대신 연장 계약을 택했다. 월드시리즈 패배라는 ‘결과’보다 2년 연속 월드시리즈에 오른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결과보다 과정’은 당연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다.

KBO리그의 가을야구도 치열했다. 히어로즈는 리그 최저연봉 팀이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상대를 끝까지 괴롭혔다. SK의 베테랑 외야수 김강민은 플레이오프 2차전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뒤 “이제 미칠 시간도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팬들을 뭉클하게 했다. 두산 주장 오재원은 1루 주자로 타자의 파울 타구에도 3루까지 전력 질주했다. 오재원은 “전력을 다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설명했다. 두산 정수빈은 방망이를 짧게 쥐고도 결승 홈런을 때렸다. 작지만 강하다는 걸 보여줬다. SK 트레이 힐만 감독은 ‘업무’가 아닌 ‘가족’으로 팀 모든 구성원을 대했다. 선수들에게 ‘컨디션이 어떠냐’고 묻는 대신 ‘아내와 아이들은 잘 지내냐’를 먼저 물었고 팀을 하나로 만들어 우승으로 이끌었다.

야구는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가을의 승패는 한없는 기쁨과, 한없는 아쉬움의 골짜기를 잔인하게 가른다. 그래도 ‘가을의 전설(Fall classic)’이라 불리는 것은, 인생의 교훈을 딱딱하지 않은,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2018년의 야구가 끝났다. 이번 가을에도 우리는 야구를 통해 또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야구기자 하길 잘했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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