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맛과 식품의 과학] 인류에 큰 힘이 되어준 도토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도토리는 정말 귀중한 구황작물이었다. 과거에 기근이 들면 솔잎, 송진, 느릅나무껍질, 도토리, 칡뿌리, 콩잎, 콩깍지, 토란, 마, 삽주뿌리, 둥굴레, 백합뿌리, 연근, 개암, 들깨, 쑥 등 온갖 식물의 잎, 열매, 뿌리를 닥치는 대로 채취해서 먹었다.

옥수수, 고구마, 감자가 있었으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이들은 우리 국토에서 자라던 것이 아니라 종자가 수입된 후 조선 말에나 일반화된다. 이때 도토리는 아주 독보적 존재였다. 다른 것들에 비해 탄수화물이 많이 포함돼 월등한 칼로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타닌(tannin)이다. 쓴맛 물질은 아주 많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타닌이다. 타닌은 식물이 초식동물이나 곤충 등의 접근을 막는 방어물질로 떫은 감, 밤 껍질에 많고 차에도 들어 있다. 타닌 중에 분자량이 작은 것이 물에 녹는 수용성 타닌으로 매우 쓰고 떫다. 이들이 다른 분자와 결합해 더 큰 분자로 변하면 불용성 타닌이 되고, 분자량이 너무 커서 혀를 자극할 수 없기 때문에 떫은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용성 타닌은 분자가 크고, 분자 안에 단백질이나 물과 강하게 결합할 수 있는 부위가 있는데 혀의 감각수용체를 변형시켜 떫은맛을 준다. 도토리를 먹은 말이 갑자기 죽거나 감을 먹은 다음 날 배변이 힘든 이유는 이런 결합력 때문이다. 대장에서 물을 분리시켜 변을 딱딱하게 만든다.

'신갈나무'를 쓴 윌리엄 로건은 도토리를 생산하는 나무의 분포와 초기 인류의 정착지가 거의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도토리가 초기 인류의 중요한 식량원이었다는 뜻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도토리를 저장하고 가루를 내어 식량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도토리가 귀중한 식량이었다. 가을 산에 가면 쉽게 많은 양을 확보할 수 있었다. 타닌이 물에 녹는 수용성인지라 도토리를 갈아 물에 여러 번 침전시키면 타닌을 어느 정도 제거할 수 있다. 고단한 작업이지만 기근을 이기는 데에 도토리만 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먹거리가 넘치는 지금도 도토리를 탐하는 경우가 많다. 도토리를 말려 가루를 내고 쓴맛을 제거해 묵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인데 과거의 추억 때문인지 도토리묵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 뛰어난 맛으로 각광받는 이베리코 돼지는 일정 기간 방목해 타닌이 풍부한 도토리를 먹여서 키운 것이다. 다람쥐들도 도토리를 좋아하는데 습한 땅속에 도토리를 묻어 쓴맛을 줄인 다음 나중에 그것을 찾아 먹는다고 한다. 식물은 자신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동물은 그것에 적응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최낙언 식품평론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