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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란 "원유 팔아 美제재 부술 것"… 청년들은 '엑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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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재 본격화… 청년 실업률 28%

리알화 가치, 1년새 70% 떨어져… 기초 생필품 값은 2~3배 치솟아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47년간 공구점을 운영해온 헤이다르 페크리(70)의 가게 진열장은 거의 텅 비어 있다. 지난 8월 미국이 이란에 대해 1차 경제 제재를 재개한 이후 수입선이 끊겨 물건을 가져다 놓지 못해서다. 페크리는 4일(현지 시각) AFP 인터뷰에서 "반년 사이 매출이 90% 줄었다.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5일부터 이란에 대한 미국의 2차 경제 제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국이 이란 숨통을 조이면서 이란인들의 삶은 구렁텅이에 빠지고 있다. 미 달러화에 대한 이란 리알화 가치는 최근 1년 새 70% 하락했다. 덩달아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생리대, 의약품 등 기초 생활 필수품 가격은 2~3배 폭등했다.

외국 기업들은 이날 시작된 미국의 대이란 제재 강화를 앞두고 서둘러 이란을 떠났다. 독일의 지멘스, 다임러와 프랑스 알스톰, 토탈 등 유럽계 대기업들이 이란에서 사업을 중단했다. 에어버스는 이란에 더 이상 여객기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2차 제재를 앞두고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해 이란을 떠난 청년들도 있다. 테헤란에서 외국계 광고 회사를 운영하는 샘 코디어씨는 "직원 서른 명 중 여섯을 해고했고 나머지는 임금을 깎았다"며 "이란의 고학력 젊은이들이 해외로 떠나는 인재 유출이 벌어지고 있다"고 AFP통신에 말했다. 의사, 엔지니어 등 고급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흐름이 미국 제재 부활로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올해 7월 이란의 실업률은 12.1%, 청년 실업률은 28.3%에 달한다. IMF(국제통화기금)는 내년 이란 경제가 3.6% 마이너스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2015년 4월 스위스 로잔에서 미국 및 유럽의 주요 5국과 핵 협상 타결을 이뤄냈을 때 환호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당시 로잔에서 협상을 마치고 귀국한 이란 외무장관은 카퍼레이드를 하며 환영을 받았다. 제재에서 벗어나 먹고살 만해질 것으로 기대한 시민들은 정부 청사로 몰려가 "고마워요, 로하니(이란 대통령)"를 외치며 환호했었다. 하지만 3년여 만에 이란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다.

성난 이란인들은 4일 테헤란 시내에서 대규모 반미(反美) 시위를 벌였다. 수천명이 모여 "마르그 발르 움메리카(미국에 죽음을)"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성조기와 트럼프 모양 허수아비에 불을 붙였다. 이날 집회는 이란 정부 관제 시위였다. 고위 권력자인 무함마드 알리 자파리 혁명수비대 총사령관이 집회 연사로 나섰다. 그는 "미국 군인은 이란 병사를 만나면 겁에 질린다. 미국의 경제 제재는 통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5일 "우리는 지금 다른 나라를 괴롭히는 강대국을 상대로 경제 전쟁을 치르고 있다"며 "우리는 지금도 원유를 팔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팔아 그들의 제재를 무너뜨리겠다"고 했다. BBC는 "경제 제재로 이란 내부에서 반정부 혁명이 벌어지는 것을 미국은 내심 기대하고 있지만 미국이 부당한 압박을 가한다고 생각하는 이란인이 적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이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무능한 정부가 실정(失政)을 미국 탓으로만 돌린다고 분개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란 젊은이들은 트위터에 '미국 대사관 포위해서 미안해(Sorry_US_Embassy_Siege)'라는 해시태그(검색을 편리하게 하는 #표시)를 붙이고 있다. 1979년 11월 4일 이란 무장 집단이 미 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의 미 외교관·시민을 444일 동안 억류해 양국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사건을 사과하는 것이다. 공교롭게 이번 미국의 2차 제재가 미 대사관 점거일 즈음에 이뤄졌다고 BBC는 전했다.

이란 정부는 러시아, EU(유럽연합)와 공조해 위기를 돌파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강경하게 나오면서 유럽도 미국 눈치를 보며 움찔하고 있다. EU는 지난 9월 계속 이란과 원유·상품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유럽 기업들과 이란의 수출입 비용 결제를 맡는 특수목적회사(SPV)를 설립하자고 의견을 모았지만 진척이 없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의 보복을 두려워한 EU 회원국들이 SPV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며 "유럽 기업들은 미국이 이란에 3차 제재를 가할지 모른다며 위축된 상태"라고 보도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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