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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Why] 외환위기 직후 분양가 상한제 폐지… 판박이 평면 아파트, 고급화 거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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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의 호모 아파트쿠스]

조선일보

서울 강남 구룡마을 뒤로 보이는 도곡동 타워팰리스.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의 등장은 인테리어 고급화 바람을 일으키며 빌트인 가구와 고가 가전 시장까지 성장시켰다. /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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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1977년 도입된 분양가 상한제는 낮은 주택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아파트를 싸게 대량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 덕분에 당시 분양권을 얻어 아파트에 입주한 가구들은 시세보다 낮은 금액으로 자기 집을 구매할 수 있었고 그 차익으로 중산층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이 정책은 건설사들이 기존의 평면 계획을 답습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실제로 1980년대 목동·상계·과천뿐만 아니라 1990년대 신도시 아파트 대부분은 1970년대 초반 이후 주택공사가 실험하고 강남 거주민들이 검증한 평면계획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 대량 복제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전국 각지의 아파트 거주자들은 지역의 특성과는 무관하게 강남 아파트의 평면계획을 원형으로 삼는 실내 공간에서 일상을 영위해나가고 있었다.

변화의 신호탄은 IMF 외환위기 직후에 시행된 분양가 상한제 폐지였다. 위기에 빠진 건설업을 구제하고자 분양가 자율화 정책이 시행되었고, 그에 따라 민간 건설사들은 아파트의 형질 전환을 시도하면서 대형화·고급화의 실험을 거듭했다. 용인 일대에서 시작된 이 실험은 강남 대치동과 분당 정자동의 주상복합 아파트로, 그리고 반포와 잠실의 대규모 재건축 단지로 옮겨가면서 '포스트 강남'이라고 불릴 만한 일련의 흐름을 만들어냈는데,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평당 분양가'는 아파트 실내 공간을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일단 평당 분양가의 가파른 상승 곡선에 따라 거실과 주방은 거듭 커졌고, 빌트인(built-in·붙박이) 가구가 보편화되었으며, 인테리어 마감재가 고급화되었다. 아토피 피부염 같은 새집 증후군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지만 대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적응이 순리였다.

양문형 냉장고, 대형 김치냉장고, '유럽형' 드럼 세탁기, 아일랜드형 부엌 등이 한층 넓어진 주방의 빈자리를 채웠고, 출처가 불분명한 유럽풍의 앤티크 가구나 젊은 '아티스트'의 회화 작품이 거실 구석이나 현관 복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거실이 커진 만큼 텔레비전 화면 크기 역시 커졌다. 뒷마무리는 드넓은 거실에서 홀로 분주히 움직이는 로봇청소기의 몫이었다.

이런 변화의 정점은 2006년 프리미엄 냉장고 '지펠 콰트로'의 출시였다.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이 제품이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가전업체들은 '아트가전'이나 '패션가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제품 표면에 꽃무늬나 나비 그림, 장식 패턴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나 인조 가죽이 동원되기도 했고, 이탈리아의 아방가르드 디자이너가 초빙되기도 했다.

확실히 자산 시장의 열풍과 소득의 양극화는 이런 흐름을 견인해낸 핵심 동력원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무지와 유니클로가 국내 시장에 상륙해 저성장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하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1970~80년대의 텔레비전·냉장고·세탁기, 1990년대의 아파트·자가용·에어컨으로 상징되던 양산형(量産型) 중산층의 20세기는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박해천 동양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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