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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Why] 戰場서, 폴란드서… 부모 두번 잃은 6·25고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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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폴란드로 간 아이들'로 감독 데뷔한 배우 추상미

조선일보

70년 전 폴란드에서 6·25 전쟁고아들을 보살핀 양육교사 상당수는 2차 세계대전 고아 출신이었다(왼쪽 사진). 추상미(오른쪽) 감독은 “트럼프와 김정은이 으르렁거릴 땐 세상에 내보낼 수 없을 것 같아 우울했다”며 “기적적으로 상황이 변하고 시사회 반응도 좋아 안도한다”고 말했다. /커넥트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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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숱한 사상자와 이산가족 말고도 고아를 낳았다. 10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전선(戰線)이 남과 북을 오르내리는 동안 북한군은 고아들을 후방으로 보냈다. 김일성은 1951년 동유럽 국가들에 "전쟁 중이니 좀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1500명은 폴란드로 실려갔다.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겪은 폴란드 사람들은 이 전쟁고아들을 정성으로 보살폈다. 천리마운동에 들어가자 김일성은 다시 노동력이 필요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1959년 북한으로 강제송환된다. 부모를 한 번 더 잃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오는 31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6·25 전쟁고아들의 흔적을 영상에 담았다. 감독은 배우 추상미(45). 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추상미와 탈북 배우 이송(25), 남과 북의 두 여성이 폴란드 보육원을 찾아가 증언을 수집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도 보여준다.

지난 16일 만난 추상미는 "낯선 땅에 도착할 땐 공포에 떨었던 아이들이 8년 뒤엔 헤어지기 싫어 통곡했다고 한다"며 "폴란드 사람들은 상처받은 다른 나라 아이들을 도우면서 자기네 상처를 치유한 셈인데, 우리는 역사의 상처를 증오로만 쓰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왜 이 실화에 끌렸나요?

"폴란드 언론인이 그 나라 공동묘지에서 김귀덕의 무덤을 발견하고 지은 소설 '천사의 날개'를 우연히 읽었어요. 김귀덕은 1955년 그곳에서 사망한 전쟁고아였습니다. 폴란드 공영방송이 2006년 다큐로도 만들었지요. 전쟁의 가장 비참한 결과물이 전쟁고아라면 자식처럼 그들을 끌어안은 세계인이 있다는 게 아름다웠어요."

조선일보

폴란드 양육원장은 “그들에겐 공부보다 ‘엄마’ ‘아빠’라 부를 사람이 더 필요했다”며 눈물지었다.


―노인이 된 양육원 교사들이 전쟁고아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저희 세대는 통일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해요. 영화를 촬영하다 그 당위성을 깨달았습니다. 내 상처가 남의 상처를 보듬는 데 선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요. 전쟁이 남북을 갈라놓았지만 결국 그 상처 때문에 하나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탈북민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데.

"통일을 긴 여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북 관계의 전환이 너무 빠르다는 게 마음에 걸려요. 전쟁을 겪고 눈앞에서 부모·형제가 죽는 모습을 본 어르신들은 불안하고 적응이 안 될 거예요. 그분들을 버리고 갈 순 없잖아요."

―당시 남한 고아들도 폴란드로 갔다고요?

"아이들 폐에서 다양한 기생충이 발견되었는데 절반은 남한 지역에 많이 서식하는 종류였어요. 북한만의 이야기가 아닌 거죠. 폴란드에서 사춘기를 보낸 고아들은 정체성이 싹트는 시기에 사랑받고 존중받았지요. 나중에 탈북한 분도 있습니다. 작년에 별세하셨다는데 말년엔 폴란드로 이민 가려 했다는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어요. 남한에서 삶이 녹록하지 않았겠지요."

―북송된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폴란드로 부친 편지들을 보면 채석장이나 벌판에서 일했어요. '날 데려갈 수 없느냐' 묻는 아이도 있었고요. 도울 길이 없어 고통스러웠고, 위험해 편지 왕래를 끊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탈북 청년들은 남한 청년들과 어떻게 다르던가요.

"그들이 겪은 이야기를 들으면 부끄러워지죠. 시체 안치소에 버려졌다 탈출한 소녀도 만났어요. '헬조선' '삼포' 같은 현실 풍자가 그들 앞에선 민망한 투정이 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경험한 고난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송 배우는 촬영하며 좀 변해갔나요?

"처음엔 어두운 경험과 상처를 감추려고만 했어요. 폴란드 사람들이 송이가 탈북했다는 걸 알고 손잡아주고 안아주니까 곧바로 눈물이 터지더라고요. 북한에서 받아보지 못한 사랑이었겠지요. 송이가 그러더라고요. 남한에 오니 북한 출신인 게 수치였다고. 무시당하고 간첩으로 몰리고 별 수모를 다 겪었으니.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데 대한 자부심을 난생처음 폴란드에서 느꼈대요."

―통일나눔펀드 지원(1억원)을 받은 작품입니다.

"큰 도움을 받았어요. 당시 폴란드 사람들은 당의 명령으로 소집되었지만 연민이 있었습니다. 보육원 원장님은 '생전 처음 보는 동양 아이들이었지만 내 유년 시절의 일부 같았다'고 하셨어요."

―감독을 해보니 배우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배우일 때는 인물의 내면에 몰입하느라 외로웠어요. 감독은 세상에 소통해야 합니다. 사회적 이슈에 민감해지더라고요."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생각이라면.

"아버지(배우 추송웅)는 '좋은 예술작품 한 편이 분노를 멈추게 하고 성찰하게 한다'는 말씀을 하곤 하셨어요. 보고 자란 영향일 텐데, 제 작업이 선한 기능을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가요. 상업영화로도 사회적 치유와 정화, 각성을 이끌 수 있다면 행복하겠지요."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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