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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전문가의 세계 - 전의령의 동물이야기] (9) ‘야생’과 ‘보호’ 사이…퓨마의 죽음이 환기시킨 ‘동물원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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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하지 않는 사회와동물에 대한 연민



경향신문

지난달 중순 대전의 한 동물원을 탈출한 퓨마가 사살된 사건은 퓨마의 희생이 정당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동시에 퓨마가 있어야 할 곳은 동물원이 아니며, 동물원의 야생동물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동물원이라는 ‘동물원의 역설’을 환기시켰다. 사살된 퓨마.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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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밖을 나선 퓨마의 죽음

한 달 전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퓨마가 열려진 우리 밖으로 나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담당 사육사가 우리를 청소한 것은 오전 9시, 실수로 열린 문 사이로 퓨마가 나온 것은 오후 5시, 우리에서 불과 200여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퓨마가 마취총을 맞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였다.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은 퓨마가 동물원 인근 산을 배회하는 동안 대전 시민들은 외출 자제와 보문산 산행 금지를 알리는 재난 문자를 받았고, 퓨마는 밤 9시40분쯤 사살되었다. 죽은 퓨마는 2010년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태어난 60㎏의 암컷 뽀롱이로 알려졌다.

이후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동물을 적절히 보호하지 않는 동물원을 폐지해야 한다는 청원들, 죽은 퓨마를 박제하지 말아달라는 청원들, 또 관리를 소홀히 한 사육사나 퓨마를 사살한 관계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청원들이 올라왔다. 적절성 여부를 떠나 이와 같은 청원들은 저마다 퓨마의 희생이 정당했던 것인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다. 좁은 우리 안에 갇혀 사는 퓨마가 호기심에 우리 밖을 나선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사람을 잘 해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퓨마를 생포하기 위해 더 힘을 써야 했던 것은 아닌가, 사람의 실수로 우리 밖을 나오게 된 퓨마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야생동물을 구속하는 동물원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등 많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정당성 여부를 잠시 제쳐두고 퓨마의 사살이 ‘희생’으로 정의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희생인가. 동물원 밖을 나와 통제되지 않는 ‘야생동물’, 특히 맹수는 인간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퓨마의 사살은 인간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것, 그것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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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퓨마를 기리기 위해 우리 옆에 세운 추모비. 중도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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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하는 사회와 희생하지 않는 사회

인류학에서 ‘희생’은 오랫동안 중요한 주제가 되어 왔다. 19세기 말부터 다양한 인류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어 온 것이 바로 ‘희생’이란 주제이다. 바타이유란 인류학자는 희생을 죽이는 것이 아닌 ‘포기하고 또 주는 것’이라 정의한다. 희생하는 것이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희생되는 것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희생이란 용어의 일상적 사용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유추해볼 수 있다. 누군가가 무엇을 위해 희생하였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이해한다. 또는 무엇을 희생하였다고 할 때 그 무엇이 절대로 하찮은 것이 아니었음을 안다. 이렇게 희생이 소중한 것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 행위의 상대자, 즉 받는 자는 누구라는 말인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사회가 희생의례를 행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희생의례가 농경목축 사회의 특징이며, 이 사회들에서 희생의례는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사회에 따라 ‘신’은 ‘부족의 창시자’ 또는 ‘가축과 풀밭을 물려준 조상’이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이 초자연적 존재에게 그들이 풍족히 먹고살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희생물을 바쳤다. 희생물은 보통 살아 있는 동물로서, 야생의 것이 아닌 집에서 기른 가축 또는 작물이어야만 했고, 종종 그것을 생산하고 기른 사람을 대신해 바쳐졌다. 여기서 우리는 희생물을 받는 초자연적 존재, 희생물을 바치는 인간, 희생물이 되는 동물 또는 식물 사이에 하나의 수직적 위계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농경목축 사회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연에 대한 상대적 통제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가축과 작물이라는 ‘제2의 자연’을 생산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까지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보다 위에 있는 초자연적 존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농경목축 사회와 전혀 다른 인간-동물, 인간-초자연 관계를 수렵채집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학자 마르셀 에나프는 수렵채집 사회에서 동물이 인간의 대등한 협력자 또는 동맹으로 여겨졌음을 이야기한다. 이 사회들에서 동물은 보통 정령이거나 정령과 관계 있는 것으로, 동물을 사냥한다는 것은 그 정령들에게 경의를 가지고 잡혀달라고 협상하고 또 잡힌 것에 감사하는 행위였다. 아메리카 북서 해안에서 연어 낚시를 하며 살았던 콰키우틀족은 ‘연어족’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치기도 했다.

“어서 오렴, 헤엄아! 고맙구나. 네가 우리의 멋진 고장으로 돌아오는 계절을 다시 맞게 되었구나. 헤엄아, 네가 돌아오는 것은 내 낚시도구와 놀기 위해서지. 이제 집으로 가서 네 친구들에게 말하렴, 얼마나 운 좋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들에게 말하렴, 나에게 풍요함을 가져다주라고. 나도 그걸 누릴 수 있게 말이야, 헤엄아! 그리고 내 몸의 병을 모두 가져가다오. 친구야, 초자연적인 존재인 헤엄아!”(마르셀 에나프, 2018, <진리의 가격>, 김혁 옮김, 눌민, 264)

자연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던 농경목축 사회에서 인간이 생산한 자연인 가축과 작물을 초자연적 존재에 바침으로써 희생의례를 행하였던 것과 달리 수렵채집 사회에서의 인간-동물, 인간-초자연 관계는 훨씬 더 직접적이고 수평적이었으며, 따라서 그 어떤 것도 희생되지 않았다. 사냥된 동물의 육체는 인간이 먹고 나면 비록 사라졌지만 그 영혼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초자연의 세계로 돌아가 동물의 형상을 하고 다시 인간과 만난다고 여겨졌다.

경향신문

동물원에서 태어난 멸종위기종인 살쾡이를 자연으로 방사하거나 무더위에 지친 불곰에게 여름 특식을 주는 행위는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의 표현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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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자본주의 속 동물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농경목축 사회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자연과 생명에 대한 기술적 통제를 획득하게 되었다. 농경목축 사회가 ‘가축’을 생산하였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각각 용도가 다른 축산동물, 반려동물, 실험동물, 전시동물 등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공장식 축산은 사료, 항생제, 살균제, 성장호르몬 등을 통해 높은 생산성 확보에 주력하고, 반려동물 산업은 이른바 ‘순종’의 선별 및 다량 생산에 초점을 두며, 세계적으로 매해 생산되는 실험동물의 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자본주의하에서 동물은 단순히 상품화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적 생산물로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크게 카우시크 순데르 라잔이라는 인류학자가 명명한 ‘생명자본’이라는 맥락 속에서 일어난다. 라잔은 자본주의의 총아로 부상한 생명공학이 생명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이 속에서 과학기술 정보와 인간, 동물의 생체물질 등이 자본의 주요 대상이 되는 현상을 생명자본이라 일컫는다.

이와 같은 생명자본의 시대에 동물은 더 이상 희생되지 않고 살처분된다. 즉 자본주의 사회는 수렵채집 사회와 매우 다른 의미에서 ‘희생하지 않는 사회’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류학적으로 ‘희생한다’는 것은 죽인다는 것이 아닌 포기한다는 것,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되는 것은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것이며, 희생하는 집단은 그들의 일부분을 떼어 바치는 것과 같은 아픔을 감수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는 희생제의를 더 이상 수반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구제역, AI 등에 의한 동물의 대량 살처분에서 인간 사회와 동물 간 ‘희생적 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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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에 지친 불곰에게 여름 특식을 주는 행위는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의 표현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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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과 연민

철학자 올리비에 라작은 동물원이라는 근대적 공간이 자연을 재현하는 독특한 방식들에 주목한다. 먼저, 동물원은 다양한 동물의 표본을 포획하여 동물원이란 인위적 공간 속에서 생물학적으로 생존시키는 것에 주력한다. 그러기 위해 전염병이 차단되어야 하며, 습도·온도·빛 등도 적절히 조절되어야 한다. 동물원은 동물의 표본을 전시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동물들이 살았던 원래의 환경을 재현하기 위한 스펙터클의 창출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원숭이 우리에는 나무, 펭귄 우리에는 인공 눈, 판다 우리에는 대나무가 으레 있게 되는 것은 실재라는 환상을 연출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동물원에서 자연의 성공적 재현은 마치 ‘야생 그대로’인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의 여부, 궁극적으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술력과 자본력에 달려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동물원들, 즉 기술과 자본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는 동물원들은 이미 자연의 성공적 재현에서 ‘실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외려 이 공간들은 동물원이란 공간의 본질적 부자연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에 대한 인간적 연민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동물원 밖을 나왔다가 사살된 퓨마의 이야기는 동물원이란 역설의 한가운데 있는 듯하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이목을 다시 동물원이라는 공간의 부자연스러움에 집중시키고, 퓨마와 같은 야생동물이 있어야 할 곳은 몇 평 남짓한 우리가 아닌 저 먼 곳에 있는 ‘야생’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뽀롱이라는 퓨마가 태어나 자란 곳이 대전의 바로 그 동물원이라는 사실은 애초에 돌아갈 야생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오히려 동물원 밖을 나왔다가 사살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상황은 동물원의 야생동물들, 즉 야생의 재현을 위해 생산된 존재들에게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은 동물원이었을지 모른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희생하지 않는 이 시대에 퓨마의 죽음이 연민을 불러일으킨다면 이 감정은 어디서 오고 무엇을 향하는가.

▶필자 전의령

경향신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채플힐) 인류학과에서 한국의 시민사회가 이주와 다문화에 대해 담론화하는 방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신)자유주의 통치성, 반다문화와 우익 포퓰리즘, 동물과 생정치에 관한 논문들을 써왔으며,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인류학적 믿음 하나로 다양한 연구 주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현재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조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병행 중이며, 전주와 파주를 오가며 세 마리의 고양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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