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빨리 달라, 우리도 달라”…동네북 된 ‘통계자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더(the) 친절한 기자들]

청와대·경제부처

고용·가계동향에 촉각 세우자

공표전 사전 제공시점 앞당기고

자료 받는 기관도 점점 늘어

월별·분기별 동향에 일희일비

정부 정책 ‘수렁에 빠질까’ 우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통계청이 지난 5월부터 통계자료를 사전 제공하는 시점을 앞당기는가 하면 제공 기관도 차츰 확대해온 것으로 드러나, 국정감사에서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관계기관의 빗발치는 요청에 따른 조처라는데, 그 배경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요?

지난 1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통계청 국정감사에서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은 기재부가 5월2일 통계청에 보낸 ‘고용동향 자료 제공 시간 조정 요청’ 공문을 공개했습니다. 이 공문에는 “법적 범위 내 가능한 이른 시점으로 자료 제공 시점을 조정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통계법 제27조에 따르면, 통계청이 통계자료를 공식 공표 전에 공개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지만, 관계기관의 업무 수행상 필요한 경우엔 예외적으로 공표 전날 낮 12시 이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통계청은 고용·물가·생산·가계동향 등의 지표를 공표 전날 오후 3시께 제공해왔습니다. 만약 유출될 경우 주식시장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전날 장이 끝날 무렵으로 제공 시점을 잡은 것입니다. 이는 관련 법 조항이 신설된 2016년 7월 이전부터 통계청 내부지침으로 이행했습니다.

지난 2월부터 취업자 수 증가 폭이 둔화해 ‘고용 쇼크’라는 우려가 쏟아지자 청와대와 경제부처는 원인과 대응을 모색하느라 분주해졌습니다. 결국 지난 2월부터 취업자 수 증가 폭이 둔화해 ‘고용 쇼크’라는 우려가 쏟아지자, 기재부는 통계자료 제공 시점을 전날 ‘오후 3시께’에서 ‘낮 12시’로 앞당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서운주 통계청 정책과장은 “법 조항이 있는데 관행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 정부기관이 통계자료를 유출해 주식시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지, 유출할 경우 처벌조항이 얼마나 엄격한지 등을 검토해 사전제공 시점을 정오께로 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고용동향뿐만 아니라 물가·생산·가계동향 등 다른 동향 통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통계지표를 사전에 받는 기관도 차츰 늘어왔습니다. 청와대(경제수석실·일자리수석실)와 기재부, 고용노동부, 국무조정실 정도였던 사전제공 기관은 일자리위원회·한국은행(5월)에 이어 국민경제자문회의(9월)·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10월)로 확대됐습니다. 빈현준 통계청 고용통계과장은 “일자리 관계기관이 많이 생겼고 고용동향에 대한 관심도 커져 정부기관의 수요가 늘어났다. 보안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 등 업무 관련성이 크지 않은 기관은 승인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빗발치는 정부기관의 사전제공 요청을 선별적으로 승인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통계법을 보면, 사전에 받은 통계자료를 목적 외에 유출할 경우 징역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처하게 돼 있습니다.

엄격한 처벌조항에도 이처럼 많은 정부기관이 통계자료를 미리 받겠다고 줄을 서는 이유는 고용·가계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청와대와 경제부처의 분위기 때문입니다. 지난 1분기 가계동향에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감소해 소득분배가 악화된 것으로 나오자 청와대는 가계소득 동향 점검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5월 고용동향에서 취업자 수가 7만명 증가하는 데 그치자 경제부처는 고용 관련 긴급 현안간담회를 열었습니다. 고용·가계소득지표가 나올 때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다 보니 더 많은 정부기관이 통계자료에 매달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최기영 통계청 노조위원장은 이번 국정감사에 참고인을 나와 “정상적인 업무가 방해받을 정도로 자료 요구가 많았다. 청와대, 기재부, 언론을 통틀어 이번에 좀 과했다는 느낌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급기야 통계자료가 발표되기 며칠 전부터 그 수치를 알고 있는 듯한 발언이 여기저기에서 나옵니다. 지난 2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9월 취업자가 한해 전보다 감소하는 ‘마이너스 고용’ 가능성을 언급했던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9일에는 “지난달(8월)보다 개선하길 기대하고 있다”는 말로 상황이 바뀌었음을 암시했습니다. 이는 9월 고용동향이 나오기 사흘 전의 일입니다. 실제로 7월과 8월 1만명 미만으로 떨어졌던 취업자 증가 폭은 9월에 4만5천명으로 반등했습니다. 9월 고용동향이 발표된 지난 12일, 기재부가 발간한 ‘최근 경제동향(10월)’에도 이 수치는 그대로 실렸습니다. 기재부가 고용지표를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이유입니다. 게다가 정치권에서도 9월 취업자 수는 4만~5만명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정책을 통해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합니다. 정부 정책이 월별 지표에 일희일비하면 가야 할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통계자료를 더 빨리, 더 많이 사전제공 받겠다고 정부기관이 앞다투는 모습이 그래서 우려스럽습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오늘의 추천 뉴스]
[▶ 블록체인 미디어 : 코인데스크] [신문구독]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