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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김정수의 월街 내부자들] ④ “보스키의 날 (Boesk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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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차익거래의 황제, 이반 보스키의 비밀 거래

이코노믹리뷰

보스키의 형량에 대한 협상이 보스키의 변호사들과 SECㆍ법무부 사이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다. 모든 미팅은 SEC나 연방 검찰의 사무실이 아니라 보스키를 변호하는 로펌인 프리드 프랭크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그들은 전화 통화를 할 때에도 결코 실명을 거명하지 않았으며 코드명으로 SEC는 ‘어빙(Irving)’을, 법무부는 ‘이고르(Igor)’를 사용했다. 협상 과정에서 보스키는 증권사기의 유죄를 인정하고, 법무부가 기소를 하되 최고 징역 5년으로 논의가 됐다. 피트는 최고 징역 3년으로 낮추고자 노력했지만 검찰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트는 결정적인 패를 가지고 있었다. 피트는 아직 보스키가 제공할 월가 거물들의 명단을 말하지 않았다. 공명심과 명예욕이 강한 연방 검사들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최고 징역형을 3년으로 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명단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연방 검사들과 SEC 변호사들은 보스키가 제공하겠다는 정보가 정말 거물급인지, 아니면 뻥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피트는 최종 타협안 서류에 이름을 적을 수는 없지만 구두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연방 검사들은 이를 수락했다. 피트의 입에서는 정말 놀라운 이름들이 흘러나왔다. 당시 미국의 금융 세계를 지배하는 인물들이었다. 정크본드의 황제 마이클 밀켄, 드렉셀의 스타 투자은행가 마틴 시겔, 웨스트 코스트의 유명 브로커 보이드 제프리스, 유명한 기업 사냥꾼인 칼 아이칸이었다. 피트는 더 명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고 3년 징역형 협상을 서면으로 확정한 후 제공하겠다고 했다.

피트로부터 놀라운 인물들의 명단을 들은 연방 정부는 이 딜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보스키가 제공한 이름들은 연방 검사나 SEC 변호사들이 예상하는 수위를 한참 넘어섰다. 보스키가 제공한 인물들은 1980년대 미국을 요동치게 했던 M&A 파도를 주도했던 핵심 인물들이었다. 카버리 검사는 줄리아니 검사장에게 보고했고, 그는 즉각적으로 딜을 승인했다. SEC 역시 위원회에 협상안을 보고했고 즉각적인 승인을 얻어냈다. 그렇게 보스키와 연방 정부 간의 딜이 성사됐다.

연방 검사들과 SEC의 변호사들은 보스키의 증언을 듣기 위해 뉴욕으로 모였다. 보스키의 변호사들도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날아왔다. 그들은 맨해튼을 조금 벗어난 지역에 위치한 웨스트버리 호텔 스위트 룸에서 만났다. 연방 정부의 인사들을 보스키를 그날 처음 보았다. 보스키의 진술이 시작됐다. 그는 의외로 너무도 쉽게 모든 얘기를 망설임 없이 털어놨다. 연방 정부의 인사들은 감탄했다. 연방 정부의 인사들은 보스키를 중심으로 했던 월가의 파워와 조직에 대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증권법을 위반하는 행위가 월가에 그렇게 만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믿을 수가 없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들은 보스키가 월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2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밀켄과 드렉셀에게 너무도 의존하고 있었다. 그는 연방 검사들과 SEC 변호사들에게 밀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고 말했다. 밀켄은 그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었다. 보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월가의 지배자는 밀켄과 드렉셀이었다. 보스키의 증언은 레빈의 증언과 거의 일치했다. 연방 검사들과 SEC 변호사들에게 보스키의 증언은 너무나 만족스러웠고, 이제 새로운 전쟁을 준비할 일만 남았다.

1986년 11월 14일 금요일 오후 3시 20분경, 보스키의 사무실에 피트가 이끄는 일군의 변호사들이 모여들었다. 보스키의 직원들은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스키는 직원들 앞에서 사전에 준비한 성명서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날의 실수에 대해 깊이 뉘우칩니다. 그리고 나 혼자서 그러한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인생은 영원히 바뀌어 버릴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라도 무언가 긍정적인 것들이 나올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나는 이 사건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요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의 실수를 계기로 우리 금융시장의 규칙과 관행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진다면 아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보스키의 진술이 끝났다. 완전한 침묵이 흘렀다. 오후 4시 28분, 미국 전역의 딜링룸, 금융회사, 그리고 뉴스룸에서 이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SEC CHARGES IVAN BOSKY WITH INSIDER TRADING (SEC, 이반 보스키의 내부자거래 혐의 고발)” 그리고 헤드라인 밑에는 “SEC는 데니스 레빈이 제공한 내부정보에 근거하여 내부자거래를 한 이반 보스키를 고발”했다고 쓰여 있었다.

오후 4시 30분, 뉴욕에서는 줄리아니가, 워싱턴에서는 SEC 위원장인 존 사드가 동시에 기자회견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4시 30분이 되자, 줄리아니는 뉴욕 남부지검 1층의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그는 보스키가 연방 범죄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형사 양형 협의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사드는 보스키가 월가에서 내부자거래 조사를 확대하고 있는 SEC에 협력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줄리아니와 사드를 비롯해 연방 검사들과 SEC 변호사들은 연방 정부의 거대한 승리를 만끽했다. 그것은 부패하고 타락한 1980년대의 탐욕스런 질주에 두 번째 심판을 의미했다.

그러나 보스키의 범죄에 대한 발표가 있자마자 연방 정부는 생각지도 않게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언론은 보스키의 범죄에 비해 지나치게 관대한 처벌을 비난하고 나섰다. 뉴욕 남부지검과 SEC 본부에 비난 전화가 빗발쳤다. 특히 《워싱턴 포스트》는 11월 21일자 신문 첫 페이지 헤드라인에 SEC가 보스키에게 범죄사실을 공개하기 전에 그의 보유물량을 매도하게 한 조치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내부자거래를 SEC가 도와 줬다는 것이다. 도대체 SEC는 왜 보스키의 비밀 매도를 지원했을까? SEC의 린치는 보스키의 대량 물량이 쏟아지면 시장이 충격을 받을까봐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로 보기 어려웠다. 보스키는 SEC에 합의금을 1억 달러를 내기로 합의했다. (당시 SEC의 1년 예산이 1억 5백만 달러였다.) 보스키는 타깃 기업의 주식을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었는데, 만약 보스키의 범죄사실 발표로 인해 시장이 붕괴되면 주가 하락으로 그 돈을 못 받을까봐 걱정한 것이다.

어찌 보면 본말이 전도된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그 돈이 SEC 변호사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주가가 하락하여 보스키의 재산이 줄어 1억 달러를 다 못 받게 된다 한들 SEC가 왜 그것을 걱정해야 하는가? 그 돈을 다 받기 위해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내부자거래를 연방 정부가 도와줘야 하는가? 정말 SEC 역사에서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하는 가장 치욕적인 결정이었다.

1986년 11월 14일, 보스키에 대한 내부자거래 유죄가 미국 월가를 뒤흔든 날, SEC는 후일 이날을 “보스키의 날(Boesky Day)”이라고 불렀다. 어느 한 트레이더는 《비즈니스 위크》에서 보스키의 유죄의 중요성에 대해 “어느 날 갑자기 기업 인수 전쟁이 끝났다. 오늘이 그날인가?”라고 했다. 《타임》도 유사한 내용을 보도했다.

그러나 기업 인수 전쟁의 시대가 아직 끝났다고 할 수 없었다. 진정한 황제는 아직 건재했다. 이제 SEC와 연방 검찰은 마지막 황제와 그의 거대한 제국을 향한 마지막 공격을 남겨 놓고 있었다. 밀켄에 대한 정부의 총공세가 강화되면서 드렉셀이 밀켄을 버린 날, 밀켄이 유죄 판결을 받은 날, 그리고 1989년 블랙 먼데이가 발발하며 1980년대의 광란의 질주가 끝났을 때 비로써 ‘탐욕의 시대’가 역사의 무대에서 종언을 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수 법무법인 율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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