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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조용헌 살롱] [1164] 계립령 고갯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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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생사봉도(生死逢道). 생과 사를 길 위에서 만난다! 일본의 어느 여행가가 한 말인데, 혼자서 만리타국을 여행할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자주 떠올랐던 말이다. 세계의 대륙도 좋지만 한반도의 호젓한 고갯길을 걸어보는 것도 왠지 모를 깊은 향수를 자아낸다.

계립령.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를 연결하는 산길이다.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왕 때 이 길을 처음으로 개척했다고 되어 있다. 신라에서 이 고갯길을 넘어가면 충주의 남한강이 나오고, 남한강 목개 나루터에서 배를 타면 뱃길을 이용하여 개성과 한양으로 갈 수도 있고, 멀리는 중국까지 갈 수도 있다.

고대 신라에서 이 계립령은 광대한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 조령(鳥嶺)이 새로 개척될 때까지 천 몇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계립령 고갯길은 신라의 가장 중요한 국도였다. 창검으로 무장한 군인들도 이 길을 넘어가고, 견마잡이가 이끄는 말을 타고 벼슬아치는 넘어갔을 것이다. 나의 상상력은 등에 가득 짐을 지고 헉헉거리며 이 고갯길을 넘어갔을 등짐장수 보부상들의 고달픔이다.

인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등에 한 짐을 가득 지고 해발 500m가 넘는 이 고갯길을 넘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인생들에게 이 길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생사봉도'가 아니었을까.

경상도 쪽에서 출발하여 고개를 넘어오면 충주 미륵리의 미륵대원(彌勒大院) 터가 나타난다. 고려시대 원(院)은 순례자와 여행객이 머무르는 간이 사찰이자 숙박 시설을 겸하고 있었다. 회(回)자 형태로 지어진 미륵대원의 내부 ㅁ자에는 마방(馬房)이 있었고, 그 바깥의 ㅁ자에는 여행객들의 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말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말을 바깥에 두면 호랑이의 습격이나 또는 말 도둑들이 훔쳐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안에다 두고 보호했던 것이다. 숙박 시설 오른쪽으로는 10m에 달하는 돌미륵이 아직도 살아 있다. 그동안 오고 갔던 수많은 여행객을 굽어살펴 주었던 돌부처이다. 돌미륵 근처의 민박집에서 이 글을 쓴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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