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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대북제재 해제와 비핵화, 무엇이 먼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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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북한과 미국의 비핵화 협상을 교착상태에 빠뜨리는 골칫거리를 흔히 ‘디테일의 악마’라고 부른다. 총론에 합의하고 각론에 들어갔을 때 불쑥 튀어나와 전진을 가로막는 ‘셈법의 차이’를 가리킨다. 그 중에서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있다. 바로 미국의 제재 해제와 북한의 비핵화 이행을 언제 주고받느냐는 문제다.

미국은 제재가 북한의 비핵화를 앞당기는 무기라고 생각한다. 강한 제재가 빠른 비핵화를 낳을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 북한은 제재를 미국의 적대정책의 상징으로 여긴다. 강한 제재에는 느린 비핵화로 맞선다. 당연히 미국은 최대한 오래 제재를 유지하려 하고, 북한은 최대한 빨리 해제를 확인하려 한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과 미국이 벌이고 있는 상응조처 줄다리기에는 이런 ‘게임의 법칙’이 숨어 있다.

법칙이 게임을 파탄에 빠뜨리기도 한다. 2005년 북핵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 직후 불거진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북한과 미국은 9·19 공동성명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으로 가는 협상의 길을 열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를 국제테러조직을 위한 돈세탁 우려 은행으로 지정하고, 북한 자금 2500만달러의 인출을 금지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은 비핵화를 압박하는 새로운 무기를 얻었다고 환호했지만, 북한은 이를 협상을 깨려는 음모로 간주했다. 결국 6자회담은 21개월이나 표류했고, 그 사이 북한은 2006년 10월 첫번째 핵실험을 감행했다.

당시 6자회담 한국 수석대표를 맡았던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을 보면, 미국의 제재에 대한 북한의 반발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다. 북한 수석대표였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금융은 피와 같다. 이것이 멈추면 심장도 멈춘다”며 일체의 협상을 거부했다. 미국은 북한 기업 8곳의 시카고 재산을 동결하고, 거래를 금지하는 추가적인 제재로 맞섰다. 제재가 반발을 부르고, 반발이 제재를 키우는 대결의 나선형에 빠져든 것이다.

제재는 매우 역설적인 외교수단이다. 북한의 비핵화뿐만 아니라 인종차별 철폐나 내전 종식, 군대 철수 등을 위한 협상에서도 제재는 늘 존재했다. 그때마다 지지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제재의 효과를 중간에 확인하기도 힘들다. 제재는 작동할 때까지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제제가 커지면 제재를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제재가 해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더는 외교수단이 아니게 된다.

파탄에 빠진 6자회담을 건져올린 건 결국 미국의 제재 해제였다. 미국은 기나긴 공방 끝에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묶인 북한 자금 2500만달러의 인출을 허용하고, 북한은 구체적인 핵폐기 이행조처에 합의했다. 이 합의는 2007년 말까지 북한이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핵프로그램을 신고하면,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로 하는 진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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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미국의 제재는 강화가 아니라 완화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추동하는 효과를 증명했다. 1994년 북한의 영변 핵시설 동결을 담은 제네바 합의 직후 미국은 북한에 대한 금융거래와 광물자원 수입을 허용했다. 2000년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했을 때는 교역 제한을 완화하고, 선박 및 항공기 운항을 허용하는 조처를 취했다. 북한의 비핵화 이행과 미국의 제재 해제 사이에 교환이 일어난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9·19 평양공동선언에서 미국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정신에 따라 상응조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추가적인 조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얘기하는 상응조처가 제재 해제와 관련된 것임은 분명하다. 김 위원장은 이를 통해 미국의 진정성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 조처를 통해 북한의 진정성을 떠보려는 것과 같다. 서로의 속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유강문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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