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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해고자 딸’로 지낸 9년, 아빠가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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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해고자 김선동씨의 딸 김윤희씨를 10월 10일 전남 순천에서 만났다. / 이하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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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가운 아빠와 딸은 아니었다. 김윤희씨(26·가명)는 “아빠는 전형적인 아빠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하루 일을 마치면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였고 주말에도 친구들을 만나러 가곤 했다. 연년생 남매와 놀아주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름이면 직장 동료 가족들과 텐트를 들고 계곡을 찾았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면 행복한 때였다.

지난 9년 동안 휴가는커녕 밥 한 끼 마음 편하게 먹은 날이 없다. 일자리를 잃은 아빠는 아빠대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는 엄마대로, 혹여나 부모에게 짐이 될까 싶었던 사춘기 아이들은 또 아이들 나름대로 힘들었다. 윤희씨는 “서로 말하진 않았지만 가족 모두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그래서 서로에게 기댈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날 새벽, 아빠는 조립공장 옥상에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09년 봄, 2000명 넘는 아빠들이 해고됐다. 해고된 자와 동료들을 저버릴 수 없었던 ‘산 자’들이 함께 공장을 점거했다. ‘총파업’ ‘옥쇄파업’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 아프리카TV에 접속하는 게 일과였다. 쌍용차 공장 입구 현장 생중계를 보고 농성 중인 아빠에게 전화로 전달했다. “아빠, 지금 경찰이 들어간대!”

엄마들은 음식을 싸들고 몰래 공장에 들어갔다. 철사 몇 곳을 끊어 만든 입구가 있었다. 겨우 사람 한 명 들고날 수 있어 ‘개구멍’이라 불렸던 곳으로 엄마들은 부지런히 오갔다. 윤희씨도 엄마를 따라 공장에 들어갔다. 공장 바닥에 얇은 스티로폼이 죽 깔려 있었다. 아빠는 거기에서 잔다고 했다. 베개도 스티로폼이었다. “여기서 잔다고? 여기서?” 몇 번을 되물었다.

여름이 됐다. 공장에 물과 전기 공급이 중단됐다. 공장 위로 헬기가 날아다니고 최루액이 뿌려졌다. 그때는 최루액이 뭔지도 몰랐다. 최루액을 맞은 스티로폼이 녹는 걸 보고서야 위험을 실감했다. 2009년 경기지방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그 해 쌍용차 파업노동자들에게 뿌려진 최루액은 2042ℓ다. 그 해 최루액 총사용량의 95.5%에 달하는 양이다.

윤희씨가 자고 있었던 8월 5일 새벽, 아빠는 조립공장 옥상에 있었다. 한참 지나 그날 영상을 봤다. 방패와 곤봉을 든 경찰특공대가 헬기를 타고 조립공장 옥상으로 내려갔다. 아빠들은 작업복을 입고 안전모를 쓰고 있었다. 식당에서 가져온 솥뚜껑으로 곤봉을 막아내려는 사람도 보였다. 그렇게 파업이 끝났다. 그날 96명이 연행됐다.

엄마가 미용실을 운영했지만 고등학생 두 명을 키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빠가 일을 해야 했다. 아빠가 엄마에게 “받아주는 곳이 없다”고 말하는 걸 엿들었다. 이해가 안 됐다. 나중에야 이게 아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동료 이윤영씨는 파업 이후 3년 동안 재취업을 하지 못했다. 이씨는 2012년 3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빠는 인력사무소를 차렸다. 사무실을 얻고 컴퓨터를 들였다. 사업 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몇 개월 만에 사무소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에는 보험영업을 했다. 윤희씨는 “영업이라는 게 서서히 친해지고 그래야 하는데 평생 자동차만 만들던 사람이 어떻게 그 걸 잘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인력사무소와 보험영업 이후 빚이 더 늘었다.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아빠는 평택항만으로 갔다. 배를 타고 들어오는 물건을 날랐다. 아빠는 바나나가 그렇게 많이 들어온다며 웃으며 말했지만 소주를 마시지 않고 잠드는 날이 없었다. 윤희씨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를 풀 수도 없었다. 밖에 나가면 돈이 드니까”라고 말했다.

그렇게 생활을 꾸려가던 중 아빠의 동료들이 철탑과 굴뚝에 올라갔다는 소식이 몇 차례 들려왔다. 해고자들은 2009년, 2012년, 2014년 각각 세 번 고공농성을 했다. 아빠는 늘 자신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동료들은 아이가 어리고 배우자가 돈을 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이유였다. “고소공포증도 있으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대꾸했지만 아빠가 굴뚝에 오를까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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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8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선동씨가 발언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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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자 4명 중 3명이 우울·불안 장애 겪어

돈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힘들었다. 다른 집에서는 그나마 아이들이 컸으니 덜 힘들지 않냐고 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또 그게 아니었다. 차라리 아예 어렸다면 감정 표현이라도 할 수 있었을텐데 윤희씨 남매는 집에서는 ‘힘들다’는 말은커녕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부모에게 짐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강박으로 자리잡았다.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힘듦을 이야기하려면 해고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윤희씨는 사람들이 자신을 불쌍한 해고자의 딸로 볼까봐, 혹은 아직도 싸우는 지긋지긋한 사람으로 볼까봐 해고자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웬만해서는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속앓이를 하며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보냈다.

아빠에 대한 감정은 복합적이다. 아빠는 늘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초등학생 시절, 아빠 손을 잡고 갔던 ‘효순이 미선이 추모집회’를 기억한다. 윤희씨는 “아빠가 하는 일이 맞고 그게 멋있는 모습이라는 걸 안다. 아빠들 싸움으로 해고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됐다. 당연히 자랑스러운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고기간이 길어지면서 미움이 삐져나왔다. 생계를 책임지게 된 엄마는 악착같이 일했고 언제부턴가 늘 ‘싼 것’만 찾았다. 오빠는 휴학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할지를 자주 고민했다. 윤희씨도 주말이면 오전에는 웨딩홀에서, 오후에는 맥주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문득 문득 ‘아빠가 해고만 안 됐어도’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서로 부딪치는 일이 잦아졌다. 아빠는 윤희씨가 하고 싶은 일을 반대했다. 안정적이지 않다는 이유였다. 어느 날 밤 부모님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그런 건 아무나 하나?”라고 말했다. 방에서 울음을 참던 윤희씨가 거실로 나가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가족한테 힘이 돼주지도 못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해고자가, 또는 해고자 가족이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은 남 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윤희씨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는 가끔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면 다 해결될까”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연구팀의 2015년 발표에 따르면 쌍용차 해고자의 75.2%가 우울 및 불안장애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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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씨가 아빠 김선동씨에게 쓴 편지. /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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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행복하거나 기쁠 순 없다”

아빠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윤희씨는 직장 때문에 1년 전부터 가족과 떨어져 전남 순천에서 지낸다. 윤희씨는 “제가 사회에 나와보니 아빠라는 사람이 이해가 됐다. 아빠도 나처럼 친구가 좋은 시절이 있었고,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서툴 수밖에 없었는데, 아빠를 개인이 아니라 아빠로만 봤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항구에서 일을 하던 아빠가 다시 쌍용차 노동조합 일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꼭 아빠여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응원했다. 얼마 전 집회에서는 직접 쓴 편지를 읽었다. 울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빠 안녕’이라는 첫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눈물이 쏟아졌다. 9년이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해고는 상처다.

지난 9월 13일, 쌍용차 노·노·사는 해고자 119명 가운데 60%를 올해 말까지 채용하고 나머지는 상반기 말까지 단계적으로 채용하는 데 합의했다. 응원 댓글도 많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대기업 들어가니 좋냐’ ‘지긋지긋하다’는 댓글도 적지 않았다. 윤희씨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히 미워요”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언론에서 비춰지는 모습만 보지만 저는 가족이니까 옆에서 보잖아요. 이 싸움을 누구보다 끝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아빠들이거든요? 어떻게든 끝내려고 했으면 개인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든, 다른 길을 가든 진작 끝냈을 거에요. 말이 9년이지 9년이 굉장한 세월인데 그런 부분을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고 김주중씨의 죽음으로 지난 몇 달 쌍용차 기사가 많았다. 윤희씨가 생각하는 아빠는 책임감있고 굳건한 ‘버팀목’ 인데 영상이나 사진 속 아빠는 늘 울고 있다. 윤희씨는 그런 아빠의 모습이 여전히 낯설다. 보고 싶지 않지만 매번 “봤어? 봤어?”라고 물어오는 아빠 때문에 보지 않을 수도 없다.

합의가 이행된다면 아빠도 올해 말, 늦어도 내년 말까지는 공장으로 돌아간다. 복직이 기쁘냐는 질문에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윤희씨는 “정리해고 이후 돌아가신 분이 서른 분이고 이혼한 가정도 많다. 그런 9년이었다. 행복하고 기쁠 순 없다. 없어도 될 일들이 일어난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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