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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방송 언어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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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나 때문에 갑분싸돼서 혼코노 가서 롬곡옾눞 흘렸어."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이것이 요즘 소위 유행한다는 '급식체' 문장인데 뜻을 풀어보면 "나 때문에 갑자기 분위기 싸해져서 혼자 코인노래방 가서 폭풍눈물 흘렸어"가 된단다. 지난주 한글날, 프로그램 안에 '급식체'를 알아보는 구성을 넣자고 하니 막내 PD가 예시로 들려준 문장이다. 줄인 말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롬곡옾눞('폭풍눈물'을 뒤집은 말)'에선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 '급식체'를 모르면 청소년들과 소통하기 어렵다니 방송 일 하는 입장에선 일단 눈여겨봐 둬야 한다.

언어는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 아무리 유행의 첨단을 좇는 방송이라도 언어만큼은 '보편성'을 따진다. 유행을 너무 좇아 은어를 남발해 가벼워 보여서도, 그렇다고 철 지난 유행어로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게 해서도 안 된다. 딱 지금,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방송 제작진들은 뉴스부터 예능 프로그램, 인터넷 댓글까지 꼼꼼히 듣고 읽으며 요즘 대중은 어떤 '말'로 소통하는지 수시로 머릿속에 입력한다.

유행만큼이나 신경 써야 할 것이 '쉬운 말'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말이 어려우면 시청자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한다. 특히 시사 보도 프로그램 제작진 입장에서 이 고민이 깊다. 얼마 전 필자도 속 쓰린 경험을 했다. '빌려준 돈 제대로 받는 법'이란 새로운 코너를 기획했는데, 실생활에 필요한 상식이라고 해놓고는 채권자, 채무자, 변제기일, 채권추심 등 전문용어가 대거 등장하면서 내용이 어려워졌다. 돈 빌려준 사람과 빌려간 사람, 돈 갚아야 할 날짜 등 최대한 쉬운 말을 썼어야 했다는 반성을 뒤늦게 했다. 20년 넘게 방송 생활을 했는데도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배웠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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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언어는 살아 있다고 한다. 처음에 등장할 때는 낯설기만 한 신조어도 대중이 많이 사용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그러니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언어의 품격을 지켜내야 한다. 이것이 방송 제작진이 매일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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