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2 (일)

[어린이책]힘없는 죄, 약자에게 더 가혹한 사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누가 가장 큰 죄를 지었나

랜장 드 라 퐁텐 지음·올리비에 모렐 그림 김현아 옮김

한울림어린이 | 48쪽 | 1만5000원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큰 위기에 빠졌을 때, 많은 권력을 가진 이일수록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말을 쓸 것도 없는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지 않은 권력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이기도 한 장 드 라 퐁텐은 흑사병에 시달리는 동물사회를 통해 권력자의 위선과 모순을 풍자했다. <누가 가장 큰 죄를 지었나>는 라 퐁텐의 우화를 현대적 감각의 일러스트로 풀어낸 어린이책이다.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가까스로 살아남은 동물들은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죽음만을 기다린다. 최고권력자인 사자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섰다. 하늘이 죄를 벌하기 위해 재앙을 내렸으니, 가장 죄가 많은 동물이 제물로 바쳐져 하늘의 노여움을 잠재워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자가 가장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식욕을 채우기 위해 양을 잡아먹었으며, 가끔 양치기도 해쳤다고. 사자는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나선다. 단, 조건을 건다. 모든 동물이 자기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마치 미리 짠 것처럼 여우가 나선다. “폐하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건 지나치게 고결한 성품 때문입니다.” 사자를 따라 호랑이, 곰도 죄를 고백하지만,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크지는 않다는 동의를 얻는다. 얼떨결에 나선 당나귀가 순진하게도 수도원의 풀을 뜯어먹었다고 고백한다. 사자, 호랑이, 곰의 죄를 가볍게 여기던 동물들의 표정은 일순 무섭게 변한다. 그리고 모든 재앙을 당나귀의 탓으로 돌린다.

권력 유무에 따라 법정의 판결이 달라지는 것은 흔한 풍경이겠지만, 라 퐁텐의 우화가 섬찟한 건 사람들이 이를 내심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혼란할 때 약자가 성난 여론의 먹잇감이 되는 건 오늘날에도 종종 목격된다. 그림을 그린 올리비에 모렐은 프랑스 현대 미술가다. 강렬하면서도 날카로운 이미지로 라 퐁텐의 우화를 되살렸다. 카트에 아이들을 실은 가난한 토끼 가족이 슈퍼카 람보르기니 앞을 지난다거나, 당나귀가 관타나모 수용소의 주황색 죄수복을 입고 끌려가는 이미지가 강렬하다. 책을 덮어도 동물들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