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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혁신 성장 가로막는 기술탈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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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탈취가 도를 넘어섰다는 비판이 잇따른다. 대기업이 하청업체에 기술자료를 요구하는 관행은 이미 굳어진 지 오래다. 갑의 요구에 을이 거절하기 힘든 산업구조에 따른 결과다. 중소기업은 향후 관계를 고려해 기술 제공 요구를 받으면 뿌리치지 못한다. 심지어 기술을 빼앗기고도 입을 다물고 만다.

이제 이 같은 갑의 횡포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하지 못하면 문재인정부가 추진하는 혁신 성장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기술탈취 입증 책임을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에 지우려고 하는 이유기도 하다.

매경이코노미

승인·품질관리 핑계로 기술공개 관행

계약 파기될라 공개했다 뺏기기 일쑤


현대중공업 협력사인 삼영기계는 최근 3년간 기술탈취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삼영기계는 1998년부터 2016년까지 현대중공업에 피스톤을 독점 공급했다.

삼영기계는 2016년 현대중공업 요구로 기술 노하우를 총망라한 자료를 현대중공업에 제출했다. 심지어 부품 제조공정도와 제품검사기준서 등 민감한 사안을 이메일 방식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현대중공업이 요청 자료를 제공하지 않으면 양산 승인이 취소될 수 있다며 제출을 강요했다는 것이 삼영기계 측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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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은 문재인정부 국정과제이자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1호 정책이다. 사진은 지난 9월 열린 ‘중소기업 기술탈취 태스크포스 2차 회의’에서 홍 장관(사진 오른쪽)이 관련 부처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중소벤처기업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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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 삼영기계 대표는 “현대중공업이 핵심 기술을 전수받은 이후 삼영기계 발주량을 급격히 줄이며 큰 피해를 입었다”고 토로했다. 실제 2014년 203억원에 달하던 현대중공업과의 거래액은 지난해 22억원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대기업 기술탈취 논란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소프트웨어 업체인 썬에어로시스의 박선태 대표도 비슷한 사례를 겪었다. 박 대표는 “현대로템으로부터 ‘최소한의 품질 검사와 유지 관리 목적의 범위 내에서 사용한다’는 명분 아래 제품 핵심인 소스코드 제출을 요구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소스코드를 제출하지 않으면 방위사업청에 제품 납품이 불가하다’는 통보까지 받자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방사청이 발주한 사업에서는 관련 소프트웨어 분야가 포함되지 않았다. 방사청이 요구하지 않은 자료를 썬에어로시스에 원한 셈이다.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은 문재인정부 국정과제이자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1호 정책이다. 기술탈취가 만연한 환경은 중소기업 기술 개발 동기를 저해하고, 결과적으로 대기업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진다. 홍 장관이 취임 직후부터 “강력한 기술보호 정책을 수립해 과거 대기업 기술탈취 관행을 개선시키겠다”고 공언한 이유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갑’의 눈치를 보느라 기술 제공 요구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응해왔다. 기술탈취 피해가 생겨도 입과 눈을 닫기 일쑤였다. 기술탈취를 신고한 중소기업과 거래하지 않으려는 대기업 간 담합·보복 역시 적극적인 대응을 막는 요인으로 꼽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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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중소기업은 기술탈취를 당해도 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고 호소한다. 기술탈취 분쟁 특성상 탈취 입증 책임은 피해기업인 중소기업에 있었다. 특허법원과 고등법원에서 피해 입은 사실을 중소기업이 직접 입증해야 했다. 하지만 대기업 제조기술 자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 연구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이 ‘우리 것을 베꼈다’고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대기업이 계열사 간 거래에서만 탈취 기술을 활용한 물품을 거래할 경우 사실상 입증이 불가능했다. 그간 대기업 기술탈취에 따른 중기 피해 규모 산정 자체가 힘들었던 이유기도 하다. 소송이 길어지면 계약관계가 깨지기 쉬워 법적 분쟁을 포기하는 사례도 많았다. 갑과 을의 전형적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셈이다.

중소벤처기업부와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이 올해 1월 실시한 ‘2017 중소기업 기술보호 수준 실태조사’에 따르면, 기업부설연구소를 보유한 중소기업 14.3%는 거래기업(대기업 등)으로부터 중요한 기술자료 제공을 요구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중앙회 최근 조사에서는 501곳 중 17곳(3.4%)이 대기업으로부터 기술자료를 요구받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김남근 변호사(민변 부회장)는 지난 9월 ‘대기업 기술탈취·기술편취 피해 사례 발표 및 근절 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대기업은 기술의 규격화, 이원화(다변화) 등을 이유로 하청종속관계에 편입된 중소기업 기술을 가져다 썼다”며 “수출 대기업이 선진국 대기업 기술을 모방하는 행위를 통해 경쟁력을 쌓았기 때문에 국내 중소기업 기술을 모방해 사용하는 행위를 위법하다고 여기는 인식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대기업은 ▲승인 ▲품질관리·국가기관 검사 ▲이원화(다원화)·규격화 ▲ 재계약 시 단가 인하 목적으로 기술을 요구해왔다. 아울러 ▲샘플을 제공받은 후 제3업체에 복제품 생산을 의뢰하고 ▲공공기관이 행정 혁신 사업에서 민간 기술을 모방하는 식으로 기술을 탈취해왔다.

김희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술탈취는 기업 간 전속적 거래관계에 놓인 중소기업이 가치사슬상 상위 기업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발생한다. 발주처와 원도급자 사이 불공정거래 관계에서 발생한 경제 부담이 가치사슬 아래 단계로 내려갈수록 가중되는 부정적인 ‘낙수효과’가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중소기업들은 ‘갑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분위기다. 기술탈취를 막기 위해 정부가 2016년부터 운영해온 ‘중소기업 기술보호 통합 상담·신고센터’의 상담 건수가 올해 크게 늘어났다. 동반성장위원회와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8월까지 기술보호센터에 접수된 상담 건수는 3948건에 달한다. 올해 말 6000건에 이를 것으로 추정돼 지난해 전체 상담 건수(5128건)보다 크게 늘어날 듯 보인다.

또한 중소기업은 정부가 지난 2월 범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기술탈취 근절 대책이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대책은 가해 혐의 대기업에 대해 입증 책임 부여, 비밀유지협약서(NDA) 체결 의무화, 기술탈취 손해배상액 최대 10배 상향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향후 대기업이 입증 책임을 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중소벤처기업부의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따르면, 정부는 기존 법에 명시되지 않았던 기술탈취 사건의 사실관계 입증 책임 의무를 ‘가해자’로 명시하기로 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기술탈취 분쟁이 생길 때 입증 책임을 대기업이 진다는 뜻이다.

개정안은 또 법원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당사자에게 증거자료를 요구할 수 있는 ‘자료제출명령제도’를 도입키로 했다. 미국 ‘디스커버리’ 제도의 한국판이다. 손해배상소송에서 사실 심리를 시작하기 전에 당사자가 서로가 가진 증거와 서류를 확보하고 이를 서로에게 공개하는 방식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대기업이 ‘영업상 비밀’을 빌미로 자료 제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기술탈취 응징 범위와 수단도 확대된다. 중기부는 개정안을 통해 기술유용행위에 대한 손해액의 최대 10배 이내의 징벌적 손해배상과 벌칙 규정을 만들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뒀다.

다만, 일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되면 ‘10배수’ 고액의 배상금을 노린 소송전이 가능하다는 의견이다. 또한 대기업 영업비밀이 과도하게 유출될 수 있다는 걱정이 나온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전 한국중소기업학회장)는 “중소기업이 꾸준히 신기술을 개발할 유인을 줘야 한다. 기술을 사용할 때 제값을 지불하는 관행이 정착되고, 전속 계약을 넘어 한 기술을 국내외 여러 기업에 판매해 수익을 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의 노력도 필요하다. 오성환 법무법인 바른 지식재산권 전문 변호사는 “교통사고나 화재처럼 혹시 벌어질 일에 대비해 조심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요즘 같은 기술 시대에서 기술탈취는 어떤 형태로든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법률 자문이나 사내 보안 강화 등 기술탈취를 막기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하는 이유”라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 = 명순영(팀장)·배준희·강승태·나건웅·김기진 기자 / 그래픽 : 신기철]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78호 (2018.10.10~10.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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