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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천안함 폭침 때도 대북 산림지원은 타진했던 북한의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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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흙 묻히기 싫어 요령 피워”

산림 부문 간부 콕집어 망신주기

“10년 안에 벌거숭이 산 없애라”

김정은 지시에 나무심기 비상 걸려

최근 25년 산림 비율 26%P 줄어

제재 해제돼야 산림협력에 탄력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사막으로 변한 북녘 … 대북 산림지원 발등에 불


중앙일보

나무가 거의 없어 민둥산에 가까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북한의 산림. 국립산림과학원은 북한 지역의 산림 899? 가운데 32%가 황폐화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진 김성일 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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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산림협력 해법은
요즘 대북접촉에 나선 우리 민간단체나 기관이 북측 인사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묘목이나 양묘장 같은 산림 분야의 지원을 시급히 해달라는 요청이다. 대북 산림지원 확보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하다는 게 관계자의 귀띔이다. 남북 당국 간 회담이나 접촉에서도 산림 분야 협력은 우선 의제로 떠올랐다. 황폐해진 북녘 산림을 녹화하는 데 주력하는 김정은 체제의 속사정과 대북 산림지원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신발에 흙을 묻히기 싫어하고 그쯤 하면 되겠지 하면서 요령주의적으로 일한 책임 일꾼들의 주인답지 못한 일본새(일하는 스타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달 30일 북한 노동신문은 산림복구 사업을 촉구하는 기사를 통해 현장 간부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평안남도 영원군은 첫 사례로 콕 집어 질타당했다. 황남 신원군에 대해서는 “서로 책임을 위에 밀고 아래에 밀면서 소극적으로 임했고, 나무 심기 계획도 미달하고 심은 나무도 잘 가꾸지 않아 식수 대상지인지 풀밭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지적했다. “나무 심기 계획을 심하게 미달하고도 허풍을 친 지역”으로는 함북 온성군과 자강도 중강군, 평북 의주군 세 곳이 꼽혔다. 공개적인 망신주기를 펼친 뒤 노동신문은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사업 실적으로 증명하는 진짜배기 일꾼이 되라”고 강조했다.

북한 당국이 이 같은 극약처방을 내놓은 건 산림복구가 화급한 사안으로 닥쳤기 때문이다. 그 진앙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다. 김정은은 집권 첫해인 2012년 5월 ‘국토관리 총동원 열성자 대회’를 소집했다. 토지 정리와 치산치수 같은 자연개조사업은 물론 산림과 도로·하천·지하자원·환경보호를 망라하는 분야에서 대변혁을 이뤄보자는 취지였다. 김 위원장은 특히 잔디와 나무 심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방문하는 공장과 기업소·군부대는 눈에 띄는 곳마다 잔디를 입히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산림 황폐화를 인정하는 발언을 수 차례 쏟아낸 김정은은 “10년 안으로 벌거숭이 산을 모두 수림화 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노동당과 북한의 각급 기관, 지역 단위는 비상이 걸렸다. 인민군 부대들이 나서 양묘장 건설에 매달렸고, 조선중앙TV 등 매체는 산림녹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캠페인을 연일 쏟아냈다. 김일성대학에는 산림과학대학이 세워졌다. 천안함 폭침과 핵·미사일 위협 등 북한의 도발로 인해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도 북한은 남측의 민간단체와 인사를 통해 대북 산림지원을 타진할 정도였다.

김정은도 직접 양묘장 등을 찾아 산림복구 상황을 점검했다. 자신이 지시해 북한 군부가 조성·관리하는 122호 양묘장은 그의 단골 현장방문 장소다. 지난 7월 이곳을 찾은 김 위원장은 ‘산림복구 전투’가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을 관철하는 사업이라며 “전 당, 전 국가적으로 힘을 집중해 중단 없이 밀고 나가라”고 강조했다. 산림조성을 “숭고한 애국사업”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지난달 29일자 노동신문이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고 가꾸는 사람이 참된 애국자”라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북 정상회담 과정에도 이 같은 분위기는 반영됐다. 지난달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서명한 평양 공동선언은 남북 환경협력 추진을 합의하면서 “우선적으로 현재 진행 중인 산림 분야 협력의 실천적 성과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정상회담 수행단으로 방북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재계 인사들이 평양 외곽의 122호 양묘장을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분단 이후 70년 넘게 황폐해진 북한의 산림을 어디부터 어떻게 손댈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립산림과학원 자료에 따르면 북한 총면적의 73% 수준인 899만㏊가 산림지역이다. 이 가운데 황폐화된 산림은 284만㏊로 전체 산림의 32%에 이른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자료(인간개발지수와 지표:2018 통계자료 개정판)는 더 심각한 상황을 보여준다. 지난 2015년 기준으로 북한 전체 면적에서 산림이 차지하는 비율은 41.8%로 파악되는데, 이는 1990년에 비해 38.7% 줄어든 수치라는 것이다. 세계은행(WB)도 90년 68.1%이던 북한의 산림 비율이 25년 사이에 26.3%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양묘장 건설과 조림 기술 제공, 병충해 방제 협력 등의 분야에 집중한다는 입장이다. 정상회담 수행원으로 평양을 다녀온 김재현 산림청장은 “북측은 대규모 양묘장을 원하지만 우리는 황폐화된 곳 위주로 군 단위의 소규모 양묘장을 만들어 주는 게 실용적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촘촘한 대북제재의 벽을 어떻게 넘을까 하는 점은 남북한 모두에게 고민거리다. 정부는 일단 산림 분야 대북지원이 남측에게도 혜택이 돌아오는 협력사업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수산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이 국립산림과학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31년까지 10만㏊의 대북 조림사업이 이뤄지면 600만t의 온실가스 감축이 나타나고, 이를 통한 탄소배출권 판매액은 1006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대북제재 저촉 우려와 관련 김 산림청장은 “병충해 약재는 문제없지만 방제 기자재 등은 일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산림청이 올해 대북지원용으로 채취해 놓은 35t가량의 산림 종자의 지원에는 큰 걸림돌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묘목을 보내거나 구입 비용을 건네려면 제재에 걸릴 수 있다. 북한도 대북제재로 인해 산림녹화에 어려움을 겪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6월 노동신문은 122호 양묘장의 자동화 설비 도입이 무산된 사실을 공개하면서 “수소탄 시험과 관련해 일부 적대세력들이 터무니없이 발동시킨 제재봉쇄 책동 때문에 그나마도 실현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이 “산림복구 전투의 사령관”(노동신문 9월 29일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녹화사업과 남북 산림협력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경제난과 대북제재의 이중고에 빠진 북한 관리들은 형식주의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는 게 우리 당국과 민간기구 인사의 전언이다. 북한 매체가 “산림복구 전투 실적은 나무를 몇 대 심었는가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몇 대를 살렸는가에 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를 지적한 것이다. 산림 분야 협력사업이 힘을 받으려면 대북제재를 자초한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 결단을 실행하는 게 무엇보다 긴요하다는 얘기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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