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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내 인생의 계절,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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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 Nicole Köhler, 출처 OGQ


유난히도 무덥고 지난한 여름을 견뎌 와서 일까. 어느새 아침저녁, 서늘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가을바람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갑기만 한 시간들이다. 가을이 오는 소리를 느끼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설렌다. 일 년 내내 가을인 나라가 있다면 그곳에서 살고 싶을 만큼 이 계절은 내게 특별하다.

누구나 자신만의 계절이 있고 그것이 주는 의미도 제각기 다를 것이다. 내게 있어 봄은 꽃의 향연 속에 마음이 날아오르게도 하지만, 힘든 순간이면 상대적으로 마음의 빈곤함을 더욱 커다랗게 만든다. 반면 가을은 기쁠 때 들뜬 마음을 겸손하게 가라앉히고 슬플 때 그 아픔을 덜어준다. 언제나 말없이 고개 끄덕여 주는 사람처럼 세상사에 관통한 듯한 너른 시선을 품고 있다.

그래서일까. 가을이면 우수에 젖거나 우울해 진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가을을 타는’ 이 시간들을 사랑한다. 모든 계절이 다 나름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지만 가을의 풍요로움은 곧 맞이하게 될 비움의 순간을 품고 있기에 더욱 찬란하다.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가을의 문턱에서 내 인생의 계절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을지 생각해 본다. 마흔 중턱을 오르는 길, 세상의 시계로는 가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내 인생이 지금 이 계절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도 덥고 습하며 때로는 예기치 않은 태풍으로 가슴이 쓸리고 해지기도 했던 기나긴 여름의 끝자락.

아직 꿈을 잃고 있지 않다면, 가슴의 두근거림을 찾아 진정한 자아로의 눈부신 항해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면 그것이 인생의 풍요로운 가을이 아닐까. 인생의 봄에 나는 봄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빛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막연하고 상상조차 버거운 먼 미래를 위해 치열한 경쟁 속을 하염없이 뛰었다. 인생의 여름이 한창일 때는 생활을 채우고 버티기에 바빴다. 직업을 갖게 되고 사랑을 찾아 가정을 이루니 그 안에서 차곡차곡 쌓아야 할 것들에 삶은 또 한없이 떠밀려 갔다. 여전히 세상일에 흔들림이 많아 ‘불혹’이라 부르기에 부끄럽지만, 가을이면 내 마음의 소리를 찾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천천히 내딛는 이 한 걸음에 더욱 큰 힘이 실린다.

이 계절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느티나무와 글방. 살구나무와 종탑. 언덕길과 종소리” 같은 고운 언어를 빚어내는 이해인 시인. 한결같은 동백꽃을 닮아 봄에 어울리는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가을이면 내 삶의 비탈길에서 늘 바른 희망의 나무가 되어 준다.

“가을에는 더 착해질 것을

다짐하는 마음에

흰 구름이 내려앉네“

가을이 오면 시인처럼 아무리 힘든 고비가 찾아와도 희망의 옷을 입으려 노력하고 싶다. 시인의 언어를 가만히 소리 내어 읊조리며 사막 같은 이 세상에 살맛나는 단비를 소망해 본다.

[유재은 작가/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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