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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치매로 아기가 된 아내… 당연히 내가 손발 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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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 장용기 할아버지, 집안일 도맡으며 4년째 아내 돌봐

치매극복의 날 최고령 수상자 선정

6·25 참전용사 장용기(93)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부엌에 안 들어가고 살았다. 50년 넘게 해로한 아내 허필주(86) 할머니가 해주는 따스운 밥을 먹었다. 여든아홉 살에 부부의 일상이 달라졌다. 할아버지는 요즘 매일 새벽 6시 눈뜨자마자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된장찌개를 데운다. 치매를 앓는 아내를 식탁으로 이끌어 나란히 아침밥을 먹은 뒤, 상 치우고 그릇 씻은 뒤 치매보호센터 차량까지 데려다준다. 할머니가 센터에서 재활 치료를 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방도 치우고 빨래도 하다 오후 5시에 다시 만난다. 4년째 반복 중인 일상이다.

조선일보

최고령 치매 극복 유공자로 선정된 장용기(93) 할아버지가 19일 서울 강동구 자택에서 웃고 있다.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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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와 중앙치매센터가 '제11회 치매극복의 날'을 맞아 20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서 장 할아버지를 포함한 치매 극복 유공자 30명에게 상을 준다. 치매 환자를 위해 애쓴 가족·자원봉사자·공무원·의료진들이다. 장 할아버지는 올해는 물론 이제까지 중앙치매센터에서 상 받은 사람 중에 최고령 기록을 세웠다.

19일 오전 찾은 할아버지의 집은 작지만 깨끗했다. 싱크대에는 물기 빠진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옷장엔 반듯하게 갠 할머니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장 할아버지 솜씨다.

할아버지는 6·25 참전 후 6년간 더 복무하고 제대해 시외버스 운전을 했다. 동대문시장에서 미제 물건을 팔던 할머니와 그때 만났다. 할머니는 달러 계산이 은행 직원보다 빠르고, 주변 사람 전화번호를 다 외워 '전화번호부'라 불렸다. 그 모습에 반해 내외가 자식 낳고 오순도순 살았다. 2008년 할머니가 뇌출혈을 앓은 뒤 '깜빡' 하는 일이 늘어났다. 2014년 어느 날 할머니가 집에 찾아온 자식을 못 알아봤다. 황급히 병원에 가보니 치매 4급이었다. 이때부터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부모'가 됐다. 집안일 도맡아 하며 아내를 돌봤다. 진단받고 첫 1년간 할아버지와 자식들이 책임지다, 이듬해부터 '송파치매주야간보호센터'의 도움을 받게 됐다. 센터에 8년째 근무 중인 요양보호사가 "4년째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웃으며 할머니를 돌보는 모습이 존경스럽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당연한 일을 했는데 나라에서 상을 준다"면서 "(힘들지만 아내인데) 별수 있나" 하고 웃었다.

중앙치매센터는 "치매 환자를 돌보는 다른 가족들에게도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손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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