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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야! 한국 사회] 속보 경쟁 / 김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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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김성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영국 <비비시>(BBC)에서 제작한 <브로큰 뉴스>(Broken News)라는 블랙코미디는 24시간 뉴스 채널의 속보와 특종의 민낯을 꼬집은 작품이다. 속보라는 뜻의 ‘브레이킹 뉴스’(Breaking News)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비슷한 음률의 ‘브로큰’(엉터리) 뉴스라는 제목을 달았다. 극에 등장하는 앵커는 끊임없이 “더 많은 뉴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를 반복하고, 현장의 기자는 “곧 자세한 정보가 이어집니다”라고 말한다. 촌각을 다투며 ‘속보’로 전달되는 수많은 뉴스가 사실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하긴 언론은 언제나 뉴스가 필요하다. 방송사가 늘어나고 방송시간이 길어지면서 언론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무한경쟁에서 언론은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때로는 사건이 아닌 것을 ‘사건’으로 만들기도 하고, 확인되지 않은 오보를 서슴지 않으며,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패널로 모아놓고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보도된 내용의 진위를 따지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전파를 탄 뉴스는 곧 또다른 속보와 특종으로 잊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금의 언론 신뢰도 추락 이면에는 권력의 통제 못지않게 시장 논리에 순종한 언론사의 속도 경쟁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언론의 행태는 한반도 평화 정착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화면 아래를 가득 채운 ‘뉴스 속보’라는 이름의 보도 대부분은 좋게 말하면 ‘해석’이고,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짐작’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방송시간을 채워야만 하는 앵커는 어렵사리 만난 양국의 지도자를 아버지 부부와 아들 내외의 모습이라는 식의 표현을 늘어놓으면서 방송 분량을 메꾸고, 두 지도자의 부인에 대한 외모 품평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들의 동작, 표정, 하다못해 먹는 음식과 옷까지 해석의 대상으로 둔갑한다.

예컨대 한 종편방송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문재인 대통령의 표정이 어둡다는 ‘짐작’을 시작으로 아직 발표되지도 않은 정상회담의 결과를 깎아내리는 ‘예언’, 거기에 회담 전후 대통령의 표정을 비교하는 화면분할까지 총동원해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축소한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부정적 심증이 난무하면서 진짜 ‘정보’는 자취를 감추고, 가짜 뉴스 혹은 사소한 해프닝이 마치 남북관계의 모든 것을 집약하는 중차대한 일대 ‘사건’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거기에 한반도 대전환기,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보수언론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평화의 노력을 폄하한다. 정상회담에 대한 객관적 보도는커녕 북한 체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부각을 위해 화면을 조정하고, 정치적 의도가 짙은 ‘주장’은 앵커와 전문가 패널의 협력으로 ‘사실’로 둔갑한다. 하긴 기득권 언론에는 자신들의 주 시청자인 보수층의 눈높이에 맞춰 북한을 향한 적대와 불신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 그나마 한자릿수의 시청률을 지켜내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전쟁 없는 한반도’라는 남북 정상의 합의는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낼 거대한 전환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전쟁 위협에서 ‘생존배낭’을 운운했던 우리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지금 우리가 언론을 통해 알고 싶은 것은 속보로 둔갑한 평양 인상기나 ‘틀리면 말고’ 식의 예언이 아니라, 이 역사적 대전환의 면면과 이 ‘시대의 기회’를 평화의 결실로 만들어낼 구체적 방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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