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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4조 벤처 일군 서울대 교수, “대학에서 창업은 지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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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가 연구 기반 벤처 세우면

‘돈벌이’ 눈총에 숨어하듯 운영

실패 두려워 교수도 나서지 않아

실험실 기업은 첨단 일자리 산실

미국에선 대학이 직접 벤처 육성

"창업을 대학의 문화로 만들어야”

‘일자리 산실’ 역할 걷어찬 한국의 대학들
중앙일보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에 안에 있는 시가총액 3조 8000억짜리 벤처 ‘바이로메드’. 맨 앞이 설립자인 김선영 전 서울대 교수다. 그는 ’실험실 벤처 육성 단지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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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둘이 세운 기업이 17조원에 팔렸다. 지난해 미국 인텔이 인수한 이스라엘 기업 ‘모빌아이’얘기다. 자동차용 영상 인식 기술 기업인 이 회사는 히브리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들이 1999년 설립했다. 대학 실험실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벤처다. 이처럼 대학이 벤처의 산파 구실을 하는 것은 창업 천국이라는 이스라엘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나온 기업이 지금까지 총 4만 곳, 일자리는 500만 개에 이른다. 신기술의 산실인 대학이 일자리 공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면 매년 수조 원 연구비를 쓰는 국내 대학의 창업 성적표는 초라하다. 지난해 국내 149개 4년제 대학에서 이뤄진 창업은 총 218건. 학교당 고작 1.5개꼴이다. 이유가 뭘까. 실제 창업을 한 교수들과 창업 지원을 맡은 교수에게 들어봤다.

#1. 지난달 정년을 2년 앞둔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은퇴를 선언했다. 정년을 채우면 주는 ‘명예교수’ 타이틀을 포기하고서였다. 바이오 벤처 ‘바이로메드’의 김선영(63) 대표가 바로 그다. 김 대표는 1992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하고 4년 뒤 벤처를 차렸다. 그는 “바이오 연구의 완성은 치료제를 내놓는 것”이라며 “완성을 보고 싶어 벤처를 세웠고, 그 목적을 마무리하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뒀다”고 설명했다. 바이로메드는 바이러스를 활용한 유전자치료 기술을 갖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유전자치료제의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 시험을 완전히 마치고 치료제를 시장에 내놓는 게 김 대표가 얘기하는 ‘마무리’다.

바이로메드는 초창기 일본에서 150억원을 투자받았다. 2005년 코스닥에 상장해 현재 시가총액이 3조8000억원에 이른다. 아직 본격적인 매출은 없지만, 연구개발(R&D)과 원천기술력을 인정받은 결과다. 직원은 80여 명이다. 그는 “큰 문제 없이 여기까지 온 나는 행운아”라며 “그러나 지금도 실험실 창업을 한 교수들은 지하운동 하듯이 벤처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Q : 지하운동이란 게 무슨 뜻인가.



A : “주변 눈치가 보여 숨어서 하듯 벤처를 세우고 운영하는 게 현실이다.”




Q : 왜 눈치를 보나.



A : “교수 월급 받으면서 또 다른 돈벌이 하느냐는 시선이 따갑다. 연구는 하지 않고 딴짓한다는 인식도 만만찮다. 벤처를 열심히 꾸려가는 어느 대학 젊은 교수는 ‘이제 그만하고 공부 좀 하지’ 소리를 종종 듣는다더라.”




Q : 교수가 따가운 눈총을 무릅쓰고 창업을 해야 하나.



A : “그렇다. 우리나라는 바이오를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면서 엄청난 R&D 비용을 쏟아붓는다. 그렇게 돈을 들여서는 대부분 논문 쓰고 끝이다. 성장동력이 되려면 연구를 바탕으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혁신적인 논문에 열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연구 결과를 성장동력으로 키울 수 없다. 성과를 일자리로 연결하는 건 국민 세금을 지원받은 연구자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Q : 창업 여건이 만만치 않을 텐데.



A : “오히려 대학이 유리한 점이 있다. R&D 벤처에 필수인 좋은 실험 장비와 뛰어난 인력을 보유했다.”




Q : 걸림돌은 대학교 내부 인식 정도인가.



A :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대학의 생각이 바뀌는 게 급선무다. 교수를 평가할 때 연구·강의와 더불어 창업도 업적으로 인정했으면 한다. 창업이 대학의 주류 문화로 자리 잡게끔 말이다. 미국 하버드대·스탠퍼드대·MIT 같은 명문대는 교수가 벤처를 세우면 대학이 키워주는 ‘인큐베이팅’을 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대학이 성장동력의 산실이다.”




Q : 창업 22년이 지났으니 주변의 인식은 그리 부담되지 않을 텐데, 왜 교수직을 그만뒀나.



A : "치료제가 나올 때가 되니 일이 많다. 강의하는 걸 정말 좋아하지만 이젠 강의하면서 벤처 운영하기 버거운 상황이 됐다. 미국에서 임상시험을 하는데, 학기 중에는 해외 출장 기간에 제한을 두는 규정 같은 것도 부담이다.”


#2. 한국산업기술대는 최근 실험실 창업이 잘 이뤄지도록 제도를 고쳤다. 창업 교수에 대해서는 강의 부담을 줄여주고, 기존 2년이던 벤처 겸직 기간을 10년까지로 늘리는 것 등이다. 산기대 고혁진 실험실창업지원센터장(49·경영학부 교수)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무엇보다 교수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Q : 교수들은 뭐가 문제인가.



A : "우리나라 교수들은 전반적으로 위험 회피 성향이 강하다. 먹고살 만하니 창업 동기가 약하다. 실패를 무릅쓰고 굳이 벤처를 차리려 들지 않는다.”




Q : 어찌해야 교수 성향을 바꿀 수 있을까.



A : "교수를 평가하는 틀에 변화가 필요하다. 교수의 정년 보장을 좌우하는 게 논문 위주의 업적 평가다. 논문 쓰기 바쁜데 어느 교수가 창업에 뛰어들겠나. ‘잘 키운 실험실 벤처 하나, 열 SCI 논문 안 부럽다’는 생각을 대학이 가져야 한다.”




Q : 창업한 교수에게 따가운 시선이 쏟아진다고 하던데.



A : "대부분 대학이 이렇게 생각한다. ‘연구하고 강의한다고 학교에서 월급 받는데 따로 또 밥벌이하네? 장비도 거저 쓰네? 학생도 부려먹네?’”




Q : 왜 그렇게 여기나.



A : "실험실 창업이 대학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창업=대학의 이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해야 한다. 실험실 벤처에 대학이 일부 지분을 참여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사실 이런 제도가 있는데, 대학이 너무 지분을 많이 갖도록 했기 때문에 교수의 창업 의욕을 꺾는 측면이 있다.”




Q : 실험실 대학원생의 창업은 어떤가.



A : "교수가 반기지 않는다. 논문 연구를 같이해야 하니까. 실험실 연구 결과로 창업할 때 기술 소유권 문제도 있다. 얼마 전에 국내 과학기술특성화대학을 돌며 대학원생을 만났더니 교수들이 이렇게 말한다더라. ‘창업, 좋다. 대신 기술권료로 지분을 50% 이상 내놔라.’ 지분 절반 이상을 남에게 주면서 누가 창업을 하겠나.”


#3. 산기대 윤원수(48·기계공학과) 교수가 운영하는 ‘티앤알바이오팹’은 코스닥 상장 심사를 받고 있다. 3D 프린팅 기술로 인공 장기 같은 생체 조직을 만드는 벤처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의 가치를 직접 창출해보겠다는 생각에 2013년 설립했다. 지난달에는 연 매출 400억 달러(약 45조원)에 이르는 독일 회사 머크사와 생체 조직 프린팅용 ‘바이오 잉크’ 공급 계약을 맺었다. 직원이 46명에 이르는, 나름대로 자리 잡은 실험실 벤처다. 가끔 동료 교수들이 윤 교수에게 창업 상담을 한다. 그럴 때 윤 교수는 첫마디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Q : 왜 만류하나.



A : "연구·강의와 벤처 운영을 같이 하는 게 정말 힘들다. 학교와 벤처 일 둘 다 욕먹지 않고 하기가 어렵다.”




Q : 산기대는 창업을 하면 강의 부담을 줄여 주는데.



A : "내가 강의를 덜 하면 학과에 다른 누군가가 더 해야 한다. 스스로 강의 줄이기가 꺼려진다.”




Q :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건 창업 열의를 꺾는 것 같다.



A : "말려도 달려들 정도로 열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실험실 창업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대학이 기업에 기술이전만 해서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기술을 개발한 교수가 사업화까지 단계별 R&D를 계속해야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실험실 창업을 하지 않으면 기술이 묻히기 십상이다.”




Q : 티앤알바이오팹이 코스닥에 상장되면 한시름 더는 것인가.



A : "아직 상장심사 결과는 모른다. 상장해도 학교 일과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 말고 또 고민이 생길 거다. 언제 손 떼고 나가 새로운 연구를 하느냐다. 벤처가 궤도에 오르면 또 다른 벤처에 도전할 새 연구를 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창업 벤처에서 손 떼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시각이 있어서….”


권혁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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