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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알제리戰 살인·고문 용서 구합니다"… 프랑스 56년만의 사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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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고문사한 독립운동가 부인 찾아가 위로

200만 알제리계 국민 포용과 經協 확대 목적도

13일(현지 시각)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파리 동북쪽 외곽 바뇰레의 한 낡은 아파트에 들어섰다. 알제리 이민자 조제트 오댕(87) 여사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거실에 들어선 마크롱은 오댕 여사의 남편 모리스 오댕(당시 25세)의 사진과 유품을 찬찬히 눈여겨봤다. 그러고 나서 오댕 여사에게 바짝 붙어 앉아 말했다.

"부군께서 1957년 돌아가신 건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돼 고문을 당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진작 사과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용서를 구합니다."

56년 만에 이뤄진 '역사적 사과'였다.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 전쟁 당시 숨진 희생자에 대해 고문과 살인을 자행한 과거를 처음으로 인정한 순간이었다. 마크롱은 "지금까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투쟁해오신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고, 오댕 여사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1830년부터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1954년부터 8년간 전쟁을 벌이며 150만명이 희생된 끝에 1962년 독립을 쟁취했다. 전쟁이 끝난 지 56년 만에 프랑스가 사과한 것이다. 마크롱은 자신의 이름으로 쓴 사과 편지도 따로 오댕 여사에게 건넸다. 고문과 살인을 인정한 것을 문서로 남긴 것이다.

1957년 알제리대 수학과 교수이자 알제리공산당 당원이었던 모리스 오댕은 자택에서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체포됐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 대원들을 몰래 숨겨준 혐의였다. 모리스 오댕이 행방불명되자 프랑스군은 그가 탈옥했다고 둘러댔지만, 알제리 정부가 독립한 이후 조사해보니 고문당해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프랑스로 넘어와 세 자녀를 키우며 살아온 오댕 여사는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남편을 고문한 사실을 인정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언론이 이를 보도했지만 사르코지는 묵살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댕 여사는 2014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올랑드는 "모리스 오댕이 감옥 안에서 사망했다"는 것까지는 인정했다. 하지만 사과가 아니었고, 고문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알제리 전쟁을 현대사의 치부로 여기고 언급 자체를 금기시한다.

오댕 여사의 호소를 묵살했던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마크롱이 결단을 내리고 오댕 여사를 찾아가 사과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특히 정치적으로 반대쪽인 좌파 진영이 환영했다. 피에르 로랑 공산당 대표는 "진실과 정의가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순간"이라고 했다. 줄곧 마크롱에게 비판적이었던 유력 일간지 르몽드도 "역사적인 결정을 했다"고 평가했다.

마크롱은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비판을 감수하고 알제리 전쟁에 대해 전향적인 역사관을 보여왔다. 작년 2월 대선 후보 시절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군은 야만적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프랑스 퇴역 군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따라서 이번에 마크롱과 프랑스 정부는 모리스 오댕의 사망에 대해서만 고문·살해를 인정했을 뿐 당시 숨진 다른 알제리인들에 대해 광범위한 책임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 군인·경찰도 수천 명 사망했기 때문에 유가족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고 르몽드는 보도했다.

마크롱이 과거사 바로잡기에 나선 것에 대해 알제리를 달래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려는 실용주의적 관점이 가미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프랑스의 광범위한 식민 통치를 경험한 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21국이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쓴다. 하지만 최근에는 중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 시장을 잠식하면서 프랑스가 밀려나고 있다는 위기를 느끼고 있다. 특히 알제리는 아프리카에서 경제 규모가 넷째로 크고 프랑스와 거리가 가까운 북아프리카의 핵심 국가다.

프랑스에는 200만명 이상의 알제리계 이민자가 살고 있다. 마크롱이 모리스 오댕의 고문·살인을 인정한 것은 알제리계 국민을 껴안는 의미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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