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평화의 챔피언’ 코피 아난, 그 성공과 좌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분쟁과 유혈의 시대, 평화를 찾아 일생을 보낸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이 18일(현지시간) 스위스 베른에서 별세했다. 향년 80세. ‘코피 아난 재단’은 이날 성명을 내고 아난 전 사무총장이 짧은 투병 끝에 베른의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알렸다. 자세한 병명은 밝히지 않았다. 아난은 최근 몇 년 동안 스위스 제네바에서 살았다.

아난은 1997년 1월 첫 흑인 유엔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2002년 재선에 성공했고 2006년 말 두번째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2001년 그는 세계 평화와 안전, 인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아난 총장과 유엔이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로이터통신은 “아난은 헌신적인 인도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온화한 화법의 중재자였고, 빈곤과 질병을 뿌리뽑는데 진력했다. 유엔 사무총장 퇴임 후에도 그는 전세계를 돌며 세계평화에 힘썼다. BBC는 “아난은 지구상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을 돕는데 헌신”한 인물이었다고 그를 추모했다.

그러나 그 역시 국제정치의 현실과 유엔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로이터통신은 아난은 시리아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으며 르완다와 보스니아, (수단) 다르푸르, 소말리아, 이라크 분쟁에서도 외교적 실패를 겪었다면서 “그의 경력은 통제할 수 없는 분쟁으로 얼룩졌다”고 전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 아난의 성공과 좌절은 특히 이라크에서 도드라진다. 아난은 2003년 미국 조지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은 “유엔 헌장을 위반한 불법적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배제한 미국의 독단적인 군사행동이 참극을 불렀다고 평가했다. 침공 이듬해 BBC 인터뷰에서 그는 “이라크전은 미국과 유엔, 다른 유엔 회원국들에 고통스런 교훈”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난은 이라크의 참극을 제어할 수 없었다. 침공을 주도한 미국, 그에 동참한 영국과 호주 등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몰아내는데 아난이 소극적이라고 반발했다. 또 한편에서는 아난이 미국 등의 침공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비판했다. 샌드위치처럼 양편에 끼인 아난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1998년 아난은 바그다드를 방문해 후세인과 악수하며 지역 긴장 완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아난과 후세인의 만남은 불과 5년 만에 터진 이라크전으로 무색해지고 말았다.

아난은 임기 중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과 수단 다르푸르 분쟁 등을 해결하기 위해 애썼지만 역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난은 2006년 유엔 사무총장 고별사에서 이들 지역을 ‘마음의 짐’으로 언급했다.

1938년 가나 쿠마시에서 태어난 아난은 반평생을 유엔에서 보낸 ‘유엔맨’이었다. 1962년 세계보건기구(WHO) 예산·행정담당관으로 유엔에 처음 몸을 담았다. 인사관리와 기획예산 책임자, 감사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93년에는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당시 사무총장의 발탁으로 유엔평화유지군(PKO) 담당 사무차장에 올랐다. 이 시절에도 그는 연이은 ‘실패’를 겪었다. 80만명이 목숨을 잃은 1994년 르완다 학살을 막지 못했고, 이듬해 보스니아 무슬림 8000명이 희생당한 스레브레니차 학살 때도 그는 무력했다. 1999년 유엔은 르완다 학살 조사보고서에서 유엔의 평화유지작전은 실패로 끝났다고 규정했다. 아난 본인도 당시를 회고하며 “우리 모두는 그것(학살)을 막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통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디애틀랜틱은 “르완다에서의 실패가 아난의 세계관을 바꿔놓았다”고 전했다.

아난은 사무총장 퇴임 이후에도 그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해 세계 평화 사절로 소임을 이어갔다. 2012년에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세계 분쟁 해소를 위해 설립한 ‘디엘더스’ 회장에 올랐다.

아난은 2008년 케냐 선거 이후 벌어진 대규모 폭력사태를 중재했다. 퇴임 후 그가 거둔 최대의 성과 중 하나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그는 또다시 좌절을 맛봤다. 시리아 내전 발발 이듬해인 2012년 유엔 및 아랍연맹 공동특사 자격으로 시리아를 방문했지만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과 반군측을 중재하는데 실패했다. 아난이 내놓은 휴전안에 양측 모두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아난 방문을 맞은 휴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고 전투가 재개됐다. 시리아 내전은 그후 6년이 지난 지금 들어서야 막바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이기간 사망자만 35만명이 넘는다.

숱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를 향한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아난 사후 추모 물결이 이어지는 이유다. 유엔 인권위원장 제이드 라드 알 후세인은 “인간의 품위를 보여주는 전형”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국제적십자 회장 피터 마우러는 “진정한 인도주의의 지도자이며 평화의 챔피언”을 잃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아난은 지난 4월 생일을 맞아 가진 BBC인터뷰에서 “나는 완고한 낙관주의자다. 나는 낙관주의자로 태어났으며 낙관주의자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평화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피력했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