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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경제 위기’ 터키를 가다]폭풍전야에도…이스탄불 밤거리는 불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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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관세폭탄’에 환율·물가 출렁

명절 앞둔 도심 위기 체감 ‘아직’

불안감 속 “곧 안정 되찾을 것”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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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밤거리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도심은 여전히 불야성을 이뤘고 시민들의 미소도 그대로였다. 어려움을 잘 해결해 줄 것이라는 에르도안 정부에 대한 믿음도 튼튼했다. 하지만 터키 리라화 가치가 연초 대비 40%가량 평가절하(환율 상승)되면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물가와 쏟아지는 경제에 대한 우울한 뉴스에 불안감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 위기의 시작일 수도, 아니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위기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터키는 폭풍전야인 것만은 분명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에서는 경제위기의 징조를 찾기 어려웠다. 러시아워를 맞아 차는 막혔고, 건물 어디에도 매각을 알리는 광고물은 없었다.

택시기사 메흐멧에게 “요즘 터키 경제가 어렵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맞다. 그러나 곧 안정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이것 봐라”라며 유로당 6.9리라로 기록된 그의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한때 유로당 7.4리라까지 갔던 것에 비하면 리라화 가치가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는 “나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믿는다”면서 “미국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지만 우리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광장·쇼핑몰에 시민들 북적

리라화 폭락, 명품 구매 인기

‘삼성이 있다’ 대통령 말에도

불매운동 안 통한 애플 매장

환율 연동 생활물가는 걱정

“본격 위기 땐 극복 힘들 듯”


야경으로 유명한 터키의 대표적 상업지구 ‘이스티클랄 거리’는 이날 저녁 차량과 사람들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흡사 크리스마스를 앞둔 한국의 명동거리 같았다. 18일부터 26일까지 9일간 이어지는 터키 최대 명절 ‘쿠르반 바이람(Kurban Bayram)’을 앞두고 많은 시민들이 쇼핑을 하러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긴 휴일을 맞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중동의 부국에서 온 관광객도 많았다.

명절을 앞두고 대대적인 할인에 들어간 H&M, 자라, 나이키 등 주요 브랜드 점포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버커킹, 맥도널드, 스타벅스 등 프랜차이즈도 가족객과 청년들로 앉을 자리가 없었다. 양고기, 케밥, 피데, 바클라바 등 터키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맛집도 길게 줄을 서 있긴 마찬가지였다. 곳곳에서 거리공연이 흥을 돋우었고 수많은 인파가 몰려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한국어와 중국어도 곳곳에서 들렸다. 환율이 끌어들인 관광객도 많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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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값 40% 급등, 시민은 ‘고통’…명품관은 대기줄만 한 시간

도심 분위기는 외견상 경제위기를 앞둔 나라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공화국 기념비가 있는 탁심광장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인근 양고기 야식당은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일부 식당은 갑자기 정전이 되기도 했다. 전력 사용량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도심 인파는 밤 11시가 되어도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터키 화장품 브랜드인 ‘플로마’ 매장에는 차도르를 쓴 여성 고객들이 계속 드나들었다. 매장 직원에게 “몇 시에 문을 닫느냐”고 물으니 “지금 몇 시냐? 너무 바빠서 시계 볼 틈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2시는 돼야 문을 닫지 않겠느냐. 지금은 보다시피 고객들이 너무 많다”고 덧붙였다.

이스탄불 중심가인 베식타시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인 조를루센터도 다르지 않았다. 식당마다 사람들로 빼곡했다. 2층짜리 아이폰 매장에도 고객들이 많았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이폰 대신 삼성이 있다”며 미국산 불매운동을 시사했지만 그 영향은 아직 없어 보였다. 아이폰 판매가격은 5000리라로 터키인 일반인 월급(2500~4000리라)보다 비싸다.

이곳에는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던 버버리 매장이 있다. 리라화가 폭락하면서 가격이 뚝 떨어지자 명품을 사기 위해 매장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은 외신을 타고 세계적 화제가 됐다. 이날도 루이뷔통 매장 앞에는 20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 명이 나가면 한 명을 들여보내는 식이라 입장이 느렸다. 대기자들은 쿠웨이트, 영국, 중국 등 주로 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쿠웨이트에서 왔다는 3명의 남녀는 “환율이 폭락해 가격이 싸다고 해서 왔다”며 “입장까지 30분 정도 걸리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1시간이 지나도 줄이 크게 줄어들지 않자 이들은 그냥 떠났다. 버버리, 불가리 등 명품 매장의 상황은 다 비슷했다. 적어도 외국인들에게는 터키가 매력적인 쇼핑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하지만 리라화 가치하락(환율 상승) 등 경제불안으로 서민경제가 서서히 고통 속으로 진입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생필품을 많이 수입하는 터키는 환율이 상승하면 생활물가가 직접 자극을 받는다. 지난 5월 2.15리라였던 오렌지주스 1ℓ는 이달 2.75리라로 28.9% 올랐다. 닭고기 1㎏은 같은 기간 12.75리라에서 17.75리라로 39.2% 올랐다. 이 같은 상승폭은 하루 일당이 50리라 정도 되는 터키인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다.

환율 변동이 극심해지면서 환전소마다 고시한 환율도 크게 차이가 났다. 공항 내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맞붙어 있는 환전소도 유로당 0.34리라나 차이가 났다. 통상은 0.2리라를 넘지 않는다. 리라를 팔 때 가격과 살 때 가격 차도 1리라 이상 나는 곳이 많았다. 한 환전소 직원에게 “옆 환전소랑 환율 차이가 왜 이렇게 크냐”고 물으니 “우리도 모르겠다”는 무뚝뚝한 답변이 돌아왔다.

리라화 가치하락에 대해 한인사회 표정은 엇갈렸다. 1년 전 리라당 원화는 320원 정도였지만 지금은 17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 달 5000리라의 월세를 내는 한인은 “1년 전에는 월세가 160만원이었는데 지금은 85만원이 된 셈”이라며 “이번에 버버리 코트도 270만원짜리를 140만원에 샀다”고 말했다. 특히 여행업은 주로 유로화 등 외화를 받기 때문에 리라화 가치폭락의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하지만 리라화로 결제하는 곳은 경영이 어려워지고 있다.

터키 사람은 리라화 가치폭락의 원인으로 취약한 터키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보다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많이 꼽고 있다. 이 때문에 미·터키 간 정치적 타협만 이뤄지면 위기에서 벗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시각이 많다. 2016년 러시아 전투기 격추로 인해 불거졌던 극한 분쟁 상황도 결국 물밑 타협으로 해결된 바 있다.

유럽과 아시아 중간에 있는 터키의 지정학적 위치상 미국이 오랫동안 터키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는 얘기다. 터키는 미군 수천명이 주둔하는 등 미국의 대중동 전략을 펴기 위한 교두보다.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이 너무 안이하다는 지적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하기 힘든 정치력과 만성적인 쌍둥이 적자 등에 시달리는 터키 경제의 기초체력으로 볼 때 하반기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을 간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루이뷔통 앞에서 만난 영국인 사업가 마크는 “아직 위기가 본격 시작되지 않아 터키인들이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비즈니스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하반기 터키 경제가 더 나빠질 것으로 보는 전망이 많다”고 했다.

<이스탄불 |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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