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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더위 잡아주는 교회…쪽방촌의 ‘시원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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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13년차 ‘등대교회’ 이야기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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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에 짜장면 나눔 공연

에어컨 있는 예배당 개방도

“일자리 찾아다닐 힘도 생겨”

만성적 재정난 존폐 위기에


지난 11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흥인지문(동대문) 주변에 고소한 짜장면 냄새가 퍼졌다. 음악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 주변 배식대에 짜장면을 받으려는 줄이 50m가량 이어졌다.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으며 피아노 연주와 성악, 밴드 공연을 즐겼다.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금지된 ‘보물 1호’ 흥인지문에서 음악회가 열린 건 처음이다. 짜장면을 곁들인 흥인지문 음악회 ‘동대문, 흥으로 열다’는 이 지역 등대교회가 마련했다. 봉사단체 ‘더희망제주’가 음악회를 주관하고 관련 비용 절반을 지원했다.

등대교회는 쪽방촌에서 무더위를 보내는 주민들을 위로하려고 음악회를 개최했다. 등대교회는 이 지역에서 13년간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 복지를 위해 일했다. 동대문 쪽방촌엔 550개의 쪽방이 있다. 300여명이 모여 산다. 대부분 혼자다. 이번 여름은 유독 이들에게 가혹한 계절이었다. 밤낮 없는 ‘폭염 재난’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8월 한낮 쪽방 내부 온도는 40도가 넘어선다. 장판이 온돌처럼 달아올라 살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창문이 아예 없는 쪽방도 많다. 만 65세 이상인 주민은 대중교통 무료 혜택을 이용해 하루 종일 에어컨이 나오는 지하철을 갈아타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진 이번 여름 등대교회는 ‘피난처’였다. 등대교회 김양옥 담임목사(51)는 밤에도 교회 문을 열어 쪽방 주민들이 예배당에서 에어컨을 쐬며 잠을 청할 수 있도록 했다. 음악회 다음날인 지난 12일 오후 이곳을 찾았을 때도 여러 주민이 에어컨 주변에 모여 앉았다. 주민 박용순씨(64)는 “쪽방촌에서 8년째 사는데 올여름처럼 더운 적이 없었다. 쪽방에서는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등대교회가 에어컨이 있는 예배당만 제공하는 건 아니다. 지난 7월엔 주민 40여명과 함께 충북 충주 수안보온천으로 2박3일 여행을 다녀왔다. 교회는 쪽방 주민들과 함께 매년 여름 피서를 떠난다. 주민들은 시원한 호텔에 묵으며 온천욕을 즐겼다. 김 목사는 “호텔에서 쉬며 비로소 사람 대접을 받는 느낌을 받는다. 주민이나 노숙인 마음속에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으니 ‘나는 무가치하다’는 깊은 절망이 있다. 이들의 자존감이 회복되면 자기 존재를 사랑하고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등대교회는 쪽방촌 주민들을 위해 매일 삼시세끼 무료 식사를 차려준다. 노숙인이 생활할 수 있는 ‘등대 공동체’ 쉼터도 열어놓았다. 샤워와 빨래를 할 수 있는 욕실도 갖췄다. 이날 오후 33㎡(약 10평) 남짓한 쉼터에서는 노숙인 2명이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지난 1월 보문역에서 노숙하다 추위를 피해 등대교회를 찾은 송모씨(55)는 식당을 페업하고 일자리를 잡지 못해 노숙인이 됐다. 송씨는 “옷차림이 깨끗해지니까 마음도 달라졌다. 노숙할 때는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삶이었지만 지금은 일자리를 찾아다닐 힘이 생겼다”고 말했다. 교회가 보여준 헌신에 마음이 움직인 주민과 노숙인 100여명은 신도가 됐다.

김 목사가 쪽방 주민과 노숙인을 위한 사역을 처음부터 준비한 건 아니다. 1992년 겨울 김 목사가 전도사로 일하던 교회로 찾아온 노숙인이 인생을 바꿨다. 평소 교회에 헌신적이던 집사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배고픈 노숙인을 내쫓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김 목사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 5곳 쪽방촌 중 유일하게 교회가 없던 창신동에 자리 잡았다.

등대교회는 위기에 처했다.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린다. 여름에는 냉방비가 한 달에 약 40만원, 겨울에는 난방비 약 80만원이 든다. 돈이 없어 그 흔한 네온 십자가도 세우지 못했다. 교회 수입은 쪽방 주민의 헌금 30%, 외부 단체 후원금 70%로 채워진다. 신도 중 주민 30여명은 기초생활수급자인데도 매달 약 2만원의 ‘십일조’를 낸다. 등대교회는 2006년 종로구의 한 지하실에서 김 목사 가족 5명, 쪽방 주민 1명, 노숙인 1명으로 시작했지만 신도가 많아지면서 지상으로 이사했다. 2009년 창신동 상가건물 2층 유흥업소를 개조한 지금의 교회에 들어왔다. 오는 12월 건물주와의 임대차계약이 끝난다. 건물주가 건물 리모델링을 계획 중이라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됐다. 동대문역 인근에서 지금 248㎡(약 75평) 규모의 공간을 구하려면 억원대 보증금에 월세 150만~200만원 정도를 내야 한다. 김 목사는 쪽방 주민, 노숙인과 함께 생활하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교회를 찾은 지난 12일 저녁 쪽방 주민들이 삼삼오오 예배당에 모여앉아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그때 교회 문이 살며시 열렸다. 머뭇하던 주민이 아는 얼굴이 예배당에 보이자 용기를 내 들어섰다. 세상과 서먹한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교회로 모여들고 있었다. 김 목사는 “사회가 쪽방 주민이나 노숙인에게 편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들은 사회의 속도보다 조금 느릴 뿐이다. 이들이 자신의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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