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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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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희 수필가·前 진천군의원

충청일보

[김윤희 수필가ㆍ前 진천군의원]어느 날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게 왔다. 자신도 글을 써 보고 싶다고 한다. 언젠가 외국인근로자들의 한글교실에 방문하여 전해준 수필집을 예사로 보지 않았던가 보다. 내용을 허투루 보지 않고 찾아 준 것이 우선 고맙고 반가웠다. 쉽지 않은 결심이다.그렇게 다가온 그녀는 훤칠한 키에 커다란 눈망울을 지녔다. 강한 생활력이 엿보이는 한편으로 무언가 간절한 눈빛이 짙은 그늘로 드리워져 있다. 문득 노천명의 詩 '사슴'의 한 구절이 그의 얼굴에서 어룽거린다 . 물 속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중략)/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보는….그때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지 모르게 가슴이 메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 후 글 한 편을 가지고 왔다. 때 이른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빗방울은 수업 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그녀의 창문을 두드린다. '아주 잠깐만 쉬어 가라고.' 그녀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모처럼 쉼을 갖는다. 달콤한 커피 속에서 문득 아이를 한국에 데리고 오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이와 함께 낯선 타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도 모를 만큼 치열하게, 삶의 일선에서 투쟁하듯 살아온 자신을 돌아본다.

수년 전 그녀는 아이의 가방에서 우연히 이중 언어강사 양성과정 모집공고 광고지를 발견하고 이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가 싶어 600시간의 과정을 꼬박 이수했다.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그해, 수입 없이 공부하느라 고국에서 집 팔아가지고 온 돈을 몽땅 썼다. 아깝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고,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중언어 강사로서의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던가 보다. 학기 초부터 강의를 따기 위해, 또 강의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몇 푼 쥐어든 강의료만 가지고 학교 다니는 아들과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시간당 강의료는 19,000원이란다. 일반적으로 지자체 또는 교육지원청 등 기관에서 최소로 잡은 강의료가 30,000원인 것에 비하면 훨씬 적은 금액이다. 더 이상한 것은 초등학교 수업의 경우 1시간은 40분이 기준인데 오전 9시부터 내리 4교시 수업을 하고 나서도 1시간을 60분 기준으로 3시간 강사료를 받는 경우다. 어떤 기준이 적용된 것인지 나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차별인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이면 당사자는 어떠하겠는가. 실제로 한국인 강사 중에는 왜 우리가 저들과 똑같은 강의료를 받느냐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우월주의가 작용한 게다. 그러나 그들에겐 기관을 상대로 개인이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다. 자칫 그나마 강의자리 마저 잃게 될까 봐 입을 다물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약자에게 군림하게 되었는가. 얼마 전부터 조심조심 심중을 글로 풀어내기 시작한 여인의 눈망울엔 여전히 그렁그렁 힘겨운 삶이 매달려 있다. 그러면서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듯 얼른 몸을 날려 일에 앞장선다. 그 몸짓이 외려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여인, 그 슬픈 눈망울을 통해 나를,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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