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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이승만 적극 도운 맥아더, '한국 문제 유엔 이관' 美정부에 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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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9] 정부 수립 행사에도 초청받아

조선일보

대한민국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에 참석한 맥아더(왼쪽) 연합군최고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눈빛제공


대한민국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한 외국 인사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맥아더 연합군최고사령관이었다. 도쿄에 주재하던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부인과 함께 서울에 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자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일본은 물론 남한을 비롯한 미군의 대일(對日) 점령 지역도 관할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이승만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군인 경력의 상당 부분을 필리핀에서 근무한 그는 극동통(通)이었다. 그는 필리핀의 군인·정치가 로물로를 통해 이승만과 친분을 맺었다. 반소(反蘇)·반공(反共)주의와 기독교라는 공통점을 가진 맥아더와 이승만은 의기투합했다.

맥아더는 이승만이 다른 망명 지도자들보다 빨리, 1945년 10월 16일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왔다.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를 거쳐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은 맥아더와 두 차례 회동을 가졌다. 맥아더는 하지 미군정 사령관을 도쿄로 불러서 함께 이승만을 만났다. 이승만은 맥아더의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왔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三相)회의가 결정한 한국 신탁통치와 미·소 협상에 부정적이었던 맥아더는 적극적인 대소(對蘇) 공세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뜻을 같이했다. 1946년 5월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끝난 뒤 미국 국무부와 남한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자 이승만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방미(訪美) 활동을 계획했다. 12월 4일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도쿄에서 맥아더를 만났다. 맥아더는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을 미국 정부에 건의하겠다고 말했고 1947년 1월 마셜 국무장관이 취임하자 이를 지켰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남한에 과도독립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가 유엔에 가입한 뒤 유엔을 통해 소련군을 철퇴시킨 다음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외교·선전 활동을 벌였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이 확실해진 1947년 9월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제출했다. 11월 14일 유엔총회는 '한국 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후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주관 아래 일련의 절차가 진행된 결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됐다.



[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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