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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아픈 사회, 우리가 보듬어야 할 이웃] "그룹홈, 한집서 먹고자는 든든한 울타리..살 맞댈 '홈' 확대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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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버려진 아이들 <하>

그룹홈, 가족처럼 함께 지내며

개개인 맞춤 보육 가능하지만

지자체 재정지원 턱없이 부족

종사자 처우 열악해 폐업 속출

정부가 나서 지원체계 손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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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엄마, 걸레 다 빨았어요. 어디다 둘까요?”

파란색 걸레를 든 한빛(13·가명)이가 거실을 가로질러 뛰어왔다. 윤설희(64) 시설장은 답을 주지 않는 대신 한빛이의 눈을 마주 본다. “어디에 어떻게 둬야 할까?” 스스로 답을 아는 듯 한빛이가 몸을 돌려 신발장 앞 빨래건조대로 뛰어갔다. “걸레는 팡팡 털어야 해요. 팡! 팡!” ‘팡’ 소리에 맞춰 몸도 폴짝 뛰어오른다.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그룹홈 ‘별빛 내리는 마을(이하 별빛마을)’과 ‘봄채’의 풍경이다.

별빛마을과 봄채는 지난 2000년부터 윤 시설장이 운영해온 그룹홈이다. 윤 시설장과 주 4일을 교대로 근무하는 보육사 2명이 아동 6명을 돌본다. 여학생 전담 그룹홈인 봄채는 초등학생 한빛이와 수영(12·가명)이, 중학생 지영(14·가명)이가 한방을 쓰고 고등학생 채영(17·가명)이와 윤서(18·가명)가 한방을 쓴다. 2일에는 윤(가명·생후 10일)이도 새로 왔다. 모두 부모에게 심한 학대를 받았거나 미혼모에 의해 버려진 아이들이다.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학원과 생태캠프·심리치료를 받으며 저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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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마을과 봄채는 정부가 그룹홈을 주목하기도 전에 아이들을 품어왔다. 24시간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윤 시설장이 어느 겨울날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쳐온 엄마의 아기를 받아 안은 게 계기가 됐다. 수개월간 아기를 돌본 뒤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미혼모가 낳은 아이들은 계속 찾아왔다. 자신이 돌보는 원생들과 같은 나이인데도 어린이집 문턱을 넘을 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아이들이었다. 윤 시설장이 하나둘씩 용기를 내 거두기 시작한 아이들은 어느덧 25평형·40평형 상가주택 두 채를 꽉 채웠다.

18년 경력의 윤 시설장이 꼽는 그룹홈의 장점은 ‘가정이 주는 자연스러운 치유’다. 아동 50여명이 함께 생활하며 철저히 공동생활을 하는 보육원과 달리 그룹홈은 아동 6명이 모여 가정의 울타리를 이룬다. 한빛이와 지영이도 만난 지 한 달 만에 서로를 언니·동생이라 부르며 둘도 없이 친해졌다. 다섯 살이 되자마자 여동생과 헤어진 지우(23·가명)도 그룹홈에 들어와 여동생과 재회했다. 한 공간에서 함께 먹고 자는 ‘큰엄마’의 존재도 아이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갓난아기 때부터 윤 시설장을 보고 지낸 지훈(3·가명)이는 윤 시설장 없이는 밥도 잘 안 먹을 정도다.

지방자치단체의 전폭적인 지원도 봄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서울시는 2012년 전국 최초로 아동공동생활가정지원센터를 만들었다. 영세한 공동생활가정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심리상담치료와 종사자 인권교육, 아동 성교육 강좌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 홀로서기의 고단함을 잘 아는 윤 시설장이 서울시 공동생활가정 조례 제정 당시 강력히 요구해 만들어졌다. 덕분에 서울시 그룹홈 아동은 90% 이상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시설장 혼자 ‘영업’을 뛰어 겨우 2~3명의 상담비를 충당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아동을 키우는 것은 한 가정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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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룹홈과 손을 맞잡아줄 마을은 극히 적다. 지방분권사업인 보육원과 달리 그룹홈 사업은 국고보조사업이라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룹홈지원센터는 전국에 서울과 부산 두 곳뿐이고 전라북도나 강원도 그룹홈은 복지수당 10만여원을 제외하면 재정 지원조차 없다. 시설설립과 보수비용은 모두 시설장 몫이고 국가가 주는 인건비는 직급·호봉·야근수당도 없는 최저임금 수준이다. 마을과 국가가 체면만 차리는 동안 그룹홈들은 매년 40개소씩 문을 닫는 형편이다.

1980년대부터 보육원을 없앤 미국과 영국·스웨덴 등은 그룹홈 생존을 위해 마을 네트워크와 재정 지원을 크게 늘렸다. 예를 들어 미국 미시간주는 그룹홈의 운영비와 아동 상담비 등을 의무 지원하고 그룹홈지역센터를 세워 종사자 교육을 담당하도록 했다. 스웨덴의 경우 오는 2020년까지 유엔 아동권리협약을 국내 법으로 수용하기로 하고 그룹홈을 모두 국가시설로 돌렸다. 일본은 광역자치단체 47곳에 그룹홈지원센터를 마련해 아동복지사를 상시 고용하고 있다.

결국 아이들에게 좋은 ‘홈’을 제공할 핵심 조건은 정부의 기획력과 결단이다. 그룹홈의 지원부족 문제는 2007년부터 꾸준히 제기됐지만 인건비가 소폭 올랐을 뿐 큰 변화는 없다. 그룹홈 예산 지원 방식도 자생방안을 고민하는 대신 획일적으로 수당만 지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형태 서울기독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정부에서 체질변화를 꾀하고 있다지만 보육원과의 지원 차이를 좁히려면 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며 “종사자 처우 등 열악한 지원체계부터 시급히 바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다은기자 dow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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