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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기후 변화는 차갑고, 누진제만 뜨거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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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칼럼] 날씨 이야기, 제대로 해봅시다!

1968년 세계혁명운동의 여진이 아직 생생하던 1973년에 서독 학생운동을 대표하던 조직 '사회주의독일학생연합(SDS)'은 인상적인 포스터를 제작했다. 온통 붉은 색인 이 포스터에는 가운데 배치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초상 말고는 단지 두 문장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모두 날씨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날씨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다니, 참으로 재기 넘치는 선전 문구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기상 관측 이후 처음이라는 40도 안팎 더위가 한 달 넘게 한반도를 달구고 있고, 한반도뿐만 아니라 북반구 전체가 말 그대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중이다. 기후 변화가 과학자들의 예상보다 더 빨리, 더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온 인류가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무엇보다도 '날씨' 이야기를 해야 할 때다. 우리 시대에는 날씨조차 역사적이다. 아니, 날씨야말로 역사이고 사회이며 정치다. 불과 한 세대 전에 서독 극좌파는 날씨 말고 혁명을 이야기하고 싶었겠지만, 이제는 날씨보다 더 절박하게 혁명을 부르는 이야깃거리도 없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기후 변화 대응의 트릴레마

지구는 오랫동안 기후 변화를 거듭했고, 현생 인류만 하더라도 몇 차례 심각한 기후 변화를 이겨내며 지금껏 생존해왔다. 그러나 한 세대만에 기후가 온대에서 아열대로 급변하는 지금 양상은 분명 인류의 개입이라는 요소 없이 설명할 수 없다. 지난 200여 년간 산업자본주의가 인간 노동력뿐만 아니라 화석 연료를 게걸스레 삼키며 방출한 이산화탄소가 기후 급변의 원인임은 지구상의 주요 기관 중 오직 미국 트럼프 행정부만 부인하는 과학적 사실이다.

이 사실이 국제사회에서 공론화된 지는 이미 오래 됐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 대표단이 모여 최초로 지구 온난화 방지 협약을 맺은 게 벌써 26년 전이다. 그런데도 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논의는 아직 탁상공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파리 기후협약 탈퇴로 논의조차 후퇴하는 형편이다.

미국 같은 강대국 지배층만 탓할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중심부가 포진한 북반구 전체가 40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신음하는 지금도 기후 변화 억제 노력은 여전히 각 나라 보통 시민들의 관심사 중 앞 순위는 아니다. 아마도 한국 사회가 대표적일 것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 가운데에서도 특히 한국에서는 기후 변화 대응이 정치 현안으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전기요금 누진제만 뜨거운 쟁점이 될 뿐이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 그리고 기후 변화 대응 사이의 어긋남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경제 체제란 자본주의다. 이윤 획득과 자본 축적이 경제 활동의 중심을 이루고 다시 그런 경제가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 그래서 탄생기부터 값싼 화석 연료의 대량 사용에 중독된 체제다. 한편 정치 체제란 민주주의다. 비록 만족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 어쨌든 모든 시민이 주권자로 상정되고 대의제를 통해 이를 구현하려 하는 체제다.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면, 기후 변화 대응이 무엇인지도 이만큼은 정의를 내려야 할 것이다. 지구 평균 기온을 산업화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자는 것도 기후 변화 대응이고, 전기요금을 내려서 가정용 에어컨 사용 비용을 줄이자는 것도 기후 변화 대응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수준 차이가 너무 크다. 아마도 중간 어디쯤을 기준으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기후 변화를 되돌리거나 중단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인간 사회 전체가 이를 견뎌낼 수 있게끔 조절하는 정도가 그런 기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기후 변화 대응 사이에는 사회과학에 간혹 등장하는 트릴레마가 있는 것 같다. 흔히 말하는 딜레마는 두 가지 선택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즉,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트릴레마란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 선택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는 상태다. 셋 중 둘을 동시에 선택할 수는 있어도 셋을 다 택할 수는 없다. 즉, 삼자택이만이 가능하다.

우선 한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중심부 대부분은 지금 어떠한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존재하되 기후 변화 대응은 좀처럼 진지하게 추진되지 못한다. 지금도 대의 민주주의는 틀림없이 작동한다. 형식적이든 어쨌든 권력과 주요 정책의 향배를 결정하는 것은 시민들이다. 지난 두 세기의 탄소 배출 관성을 유지하라고 강요하는 독재자 따위는 없다. 그런데도 기후 변화 가속화를 막으려는 결단은 찾아보기 힘들다. 북유럽 몇 나라 같은 예외도 있지만 말이다.

민주주의 자체의 한계 탓인가? 그보다는 자본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라는 데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운영자들은 자본 축적이 계속되는 한 기존 에너지 체제나 탄소 배출 구조를 크게 손보려 하지 않는다. 이윤을 당장 손해 보면서까지 현재의 산업 토대를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엄청난 환경오염에도 불구하고 오일 샌드를 파내 화석 에너지 시대를 연장하려 하고, 화석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중앙집권적 에너지 체제에 어울리는 핵 발전에 집착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체제에서 시민들은 이런 경제 현실의 틀 안에서 판단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다. 현존 에너지 체제나 산업 구조를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전제하고서 더 더워지거나 추워진 날씨를 견뎌낼 방안을 찾으려 한다. 이런 맥락에서는 전기 난방이나 냉방의 소비자 비용을 낮춰서 가장 덥거나 추운 시기를 어떻게든 넘기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리고 어쨌든 민주주의라면 이런 시민들의 목소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에너지 사용량이 더 많아지는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전기요금 누진제를 일단 완화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만 하다 보면 기후 변화 대응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 체제 혁신 없이 대증 요법만 반복하면, 에너지 사용량이나 탄소 배출량은 줄기는커녕 더 늘어나기 쉽다. 그럼 기후 변화 속도는 더욱 빨라지게 되고, 이를 견뎌내는 데 필요한 당장의 에너지 사용량 역시 더 늘어난다. 악순환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합은 이렇게 기후 변화 대응에 무력하기만 하다.

이 상황이 끝없이 계속될 수는 없다. 기후 변화가 더욱 진전돼 가령 농업 생산이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면, 인간 사회도 더 이상 관성에만 머물 수는 없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기후 변화에 맞춰 대대적인 사회 재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같은 자본주의-민주주의 조합으로 이런 대응이 가능할까?

뒤늦게 기후 변화에 맞서려면, 그간 늘어날 대로 늘어난 기후 변화 피해를 처리해야만 한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이 피해는 자본 축적의 지속을 위협하는 비용 상승 요인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틀 안에서 이에 대한 합리적 대응은 기후 변화 피해를 자본이 부담해야 할 비용 목록에서 삭제하는 것이다. 대신 피해를 입은 개별 시민이 안고 가야 할 문제로 치부하면 된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정치 체제, 즉 민주주의 쪽에 심각한 긴장을 낳을 수밖에 없다. 늘 그렇듯 기후 변화 피해는 계급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이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일국 자본주의 안에서는 저소득층에게, 지구 자본주의 전체에서는 주변부 민중에게 몰릴 것이다. 민주주의가 어떤 식으로든 작동한다면, 이들의 불만에 체제가 흔들리기 십상이다. 자본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가 이런 위협에 대응하는 통상적인 방식은 불만의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가 끌어안는 '시민'의 범주를 좁히는 것이다.

그 불길한 조짐은 이미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에서 얼핏 드러났다. 이 논란에서 가시화된 사회적 주체는 그나마 에어컨이라도 있는 시민들이었다. 에어컨조차 갖출 여력이 없는 시민들은 이 논란에서 끝내 '투명인간'으로 남았다. 그들은 기후 변화 현실 앞에서 민주주의에 초대받지 못한 시민, 즉 시민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다.

기후 변화가 더욱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는 이런 민주주의의 자기기만이 결국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아닌 다른 무엇으로 전락시키고 말 위험이 높다. 민주주의가 스스로 비상계엄체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상계엄체제는 위기에 맞서 '시민'을 지켜야 한다면서 시민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들을 배제하고 실은 남은 '시민'들의 권리마저 제한할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기후 변화 대응의 조합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희생시켜야 한다. 과거에도 위기 상황에서 이런 전례가 있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대공황의 여파 속에 '민주적 절차를 통해' 나치 체제로 전환했다. 대공황을 앞두고 선택이 이러했다면, 그보다 더 가공할 규모일 기후 격변 앞에서는 과연 어떠할까.

민주주의-기후 변화 대응의 조합만이 희망이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기후 변화 대응 가운데 우리에게 점점 더 절실해지는 것은 기후 변화 대응이고,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민주주의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합은 기후 변화 대응에 무력하고, 자본주의 틀 안에서 기후 변화에 대응하려 하면 민주주의가 위험에 빠진다. 그럼 민주주의와 기후 변화 대응의 조합을 성사시키려면 어떠한 조건이 필요한지는 적어도 논리상으로는 명확하다. 인간 사회가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게 속 시원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기후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현존 자본주의도 아니고 20세기식 국가사회주의도 아닌 어떤 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듣는 이에게 혁명의 의욕보다는 기후 변화 대응은 불가능하겠다는 좌절만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불굴의 혁명가가 아닌 한, 사회 변화와 기후 변화의 속도 경쟁에서 인류가 패배할 결말만 남았다는 비관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해석할 일은 아니다. 민주주의와 기후 변화 대응의 조합을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완성된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시도'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것은 재생가능에너지가 중심을 이루고 낭비를 최소화하는 에너지 체제를 구축하려는 공공(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등)의 민주적 개입이고, 단순한 시장 행동이나 결정을 넘어서는 생태 전환 계획의 수립과 실행이며, 이윤이 아니라 후세대의 생존이나 사회 재생을 목표로 삼은 기업(공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경영의 실험이다.

일단 이런 시도들이 시작되고 나면, 민주주의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최적의 정치 체제임을 증명할 것이다. 가짜 뉴스와 반지성적 논거가 창궐하는 것도 민주주의이지만, 실물로 제시되는 대안의 폭이 넓어질수록 최상의 지적, 도덕적 결정에 근접하는 것도 민주주의다. 기존 경제 체제의 제약에 갇히지 않은 새로운 에너지 사용 시도나 저탄소 경제 실험들이 가시화되면, 민주주의는 결코 전기요금 논란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뼈와 살을 갖춘 대안이 시민들의 생각을 바꾸고 다시 그런 생각의 변화가 더 풍부한 대안을 낳는 선순환이 작동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은 멸망보다는 반전(反轉) 쪽에 말을 걸고 싶다. 21세기 내내 지구 생태계의 변화와 인간 사회 사이에 피 말리는 경주가 계속되겠지만,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경제 체제를 위해 나머지 모두를 희생시키기보다는 인류가 이룬 그나마 나은 것들(가령 민주주의 등등)을 포기하지 않으며 다음 세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싶다. 어쨌든 저 험난했던 20세기도 최악의 결과(식민 지배의 지속, 나치의 승리, 핵전쟁 등등)는 피한 채로 끝맺지 않았는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더위에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에, 더구나 저 푸른 하늘이 그 소식을 가득 품은 듯해 견딜만하다. 아니, 설레기까지 한다.

기후 변화를 마주한 21세기 인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끝내 살아남아 문명의 가을을 맞이해야 한다.

기자 :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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