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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김지석의 화·들·짝] 페미니즘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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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6년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는 3세대 페미니즘 운동은 법과 제도에 더해 성차별적인 관행·관습, 나아가 감성까지 문제로 삼는다. 무심코 되풀이되는 일상적인 행위 전체를 성평등이라는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더 근본적이고 치열하다.

지금의 운동은 지도부에 해당하는 그룹이 두드러지지 않고 대중이 바로 주체로 등장한다. 이들에게 페미니즘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해답이 나올 때까지 실천해야 할 당위가 된다. 젊은 여성들이 함께 이런 인식을 갖고 행동에 나서는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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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여성주의)의 새로운 물결이 거세다. 올해 초부터 본격화한 미투운동에 이어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대규모 시위가 5월부터 네차례나 열렸다. 지난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있었던 네번째 시위에는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도 7만명(주최 쪽 추산)이나 모였다. 페미니즘의 새 시대, 새 물결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모습이 갑작스러운 건 아니다. 징조는 2015년쯤부터 있었다. 여러 언론 매체의 여성 혐오 분위기에 대한 반발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또 일베 등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빌미 삼아 여성을 공격하는 것에 맞서 여성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적극적으로 반격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분기점은 2016년 5월 일어난 서울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이다. 30대 남성이 노래방 화장실에서 아무 이유 없이 20대 여성을 칼로 찔러 숨지게 한 이 사건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는 피해자를 추모하고 여성 혐오를 비판하는 상징적 장소가 됐다. ‘대중이 주도하는 페미니즘 집회’라는 새 현상의 출현이다. 2016년 가을부터 이어진 국정농단 규탄 촛불집회에 참여한 여성들 가운데 일부는 촛불광장조차 여성에게 평등하지 않다며 광장 안팎에 ‘페미존’을 만들었다. 올해의 미투운동과 대규모 여성 시위는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여러 움직임은 3세대 페미니즘 운동으로 분류할 수 있다.

1세대는 대략 1990년까지의 기간이다. 여성의 시민권 확보에 초점을 맞춘 이 시기의 페미니즘 운동은 큰 틀에서 민주화운동의 일부를 이룬다. 기본적인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페미니즘의 독자적인 영역을 강하게 주장하기보다는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는 측면이 강조됐다. 민주화를 선행해야 한다는 당위에 더해 민주화가 되면 여성 문제도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낙관이 함께 있었다. 이 시기는 1987년 6·10 민주항쟁과 그해 말 직선제 대선, 이후 집권한 보수 정부가 마지못해 실행한 몇몇 민주 개혁으로 마무리된다.

이후 최근까지의 2세대에는 여성 문제를 독자적인 범주로 설정하고 법적·제도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 이뤄진다. 민주화가 되더라도 여성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이런 모순이 여러 사건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이슈별로 해법 모색이 적극적으로 시도된다. 서울대 신 교수 사건(1992~93년)을 계기로 성희롱 문제가 공론화돼 성폭력특별법이 처음 만들어진 것이 대표 사례다. 여성의 권익 증진 등 지위 향상을 위해 여성부(지금의 여성가족부)가 2001년 처음 발족했고, 2005년 3월에는 민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 많은 여성의 바람이었던 호주제 폐지가 성사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기돼 국제사회의 큰 호응을 받은 것도 이 시기다. 2세대 페미니즘 운동은 성평등을 나라의 정책 목표로 설정해 여러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 법·제도가 실질적으로 얼마나 유효하게 작동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2016년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는 3세대 페미니즘 운동은 법과 제도에 더해 성차별적인 관행·관습, 나아가 감성까지 문제로 삼는다. 무심코 되풀이되는 일상적인 행위 전체를 성평등이라는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더 근본적이고 치열하다.

여기에는 1·2세대와는 다른 새 주체가 있다. 1·2세대 페미니즘 운동은 의식 있는 소수 고학력 여성과 선도적인 여성 노동자가 주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지금의 운동은 지도부에 해당하는 그룹이 두드러지지 않고 대중이 바로 주체로 등장한다. 이들은 이전 세대의 운동 지도부를 불신하며 온라인을 통해 이합집산을 되풀이한다. 대부분 민주화 이후 풍요의 시대에 성장기를 보낸 이들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적어도 말로는 성평등을 당연하게 배우고 그렇게 여겨왔다.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기본적인 존재 조건이 흔들리는 듯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이들에게 페미니즘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해답이 나올 때까지 실천해야 할 당위가 된다. 젊은 여성들이 함께 이런 인식을 갖고 행동에 나서는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이다.

■ 성차별은 권력관계의 산물이다. 기득권을 가진 쪽의 논리와 행위가 관철되는 구조를 전제로 한다. 페미니즘은 이에 맞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적극적인 시민권을 확보하고 실질적 평등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말의 성(性)은 영어의 성(sex)과 젠더(gender)와 성애(sexuality)를 모두 포괄한다. 성평등 또한 생물학적인 남녀의 평등뿐만 아니라 젠더 평등과 성애 평등을 함께 뜻한다. 성(sex)은 생물학적인 구분이다. 크게 남녀로 나뉘지만 그렇지 않은 소수가 있다. 생물학적인 성의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민주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으로, 흔히 역할 구분으로 나타난다. 현대 페미니즘 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곳이 이 영역이다. 남성 우위 사회에서는 젠더에서도 위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성차별과 성폭력이라는 형태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성애 역시 평등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임신·출산 등과 관련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온전하게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일상적인 성생활에서도 자기주도성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다. 이성애가 아닌 형태의 성애에서는 더 그렇다.

■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일부가 촛불혁명을 비판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촛불혁명이 성차별·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페미니즘 운동 자체가 민주화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큰 변화 속에서 이뤄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1세대 페미니즘은 민주화운동 시대에 모양을 갖췄으며, 2세대 페미니즘은 민주화의 일정한 성과 아래 각 부문이 자신의 과제를 새로 설정하고 해결책을 찾던 과정에 상응한다. 이 시기에 한국형 시민운동이 자리를 잡았고, 노동운동이 정비되고 의석을 가진 진보정당이 출현했으며, 평화운동이 정체성을 확보하고 남북 관계 전환이 모색됐다.

지금은 민주화 30년의 기반 위에서 좀 더 인간적이고 생태적이며 평화 지향적인 모색이 이뤄지는 시기다. 그 핵심 계기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낡은 시대를 민주적으로 청산한 촛불집회다. 3세대 페미니즘 운동 역시 이 파장 속에 있다.

■ 페미니즘은 차별받는 쪽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본성상 진보적이다. 또한 성차별 해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본 구조를 바꾸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요구한다. 다른 성의 생각과 감수성, 행위 등의 총체적인 변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문화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운동에서는 퇴행적인 측면도 일부 나타난다. 일부 온라인 사이트가 자신들이 당한 방식을 반대로 재연하는 ‘미러링 전략’에 치중하면서 무차별적 남성 혐오나 다른 소수자를 차별하는 쪽으로 쏠리는 것 등이 그렇다. ‘익명의 대중’을 내세우고 누가 운동을 주도하는지 알 수 없도록 하는 것도 발전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기가 쉽다. 기존 권위에 대한 부정 의식이 지나쳐, 정치적인 주체로 전화할 수 있는 여지마저 축소하는 것은 올바른 전략이 아니다.

모든 운동은 결국 세력화를 통해 변화를 만든다. 많은 사람을 주체로 참여시켜 그 힘을 확산하고 곳곳에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미래를 위한 우리의 최선의 정치적 희망은 상호 존중과 차이에 대한 공감에 근거해 연대를 형성하고 공통 근거를 찾는 데 있으며, … 교조와 지나친 단순화의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미국의 한 페미니즘 활동가 겸 연구자가 오래전에 한 말이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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