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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공무집행방해 혐의 무죄와 두 마리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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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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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우 변호사의 법률 이야기-67] 2012년 봄에 부산지방법원에서 재미있는 판결이 나왔다. 사건의 죄명은 공무집행방해였는데 무죄 판결이 났다. 직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을 폭행하거나 협박한 경우에 성립하는 죄가 공무집행방해죄다. 5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아래는 판결문을 토대로 사안을 각색했다)

2011년 11월 연말에 A씨는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날이 밝았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다. 어제 찾아간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등본 한 장을 떼는데 담당자마저 불친절했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일로 속상한데 주민센터에서도 퇴짜를 맞았다는 기분이 들자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을 먹고 잊으려 해도 불친절했던 주민센터 담당자, 서른이 갓 넘어 보이던 그 여성 담당자 얼굴이 잊히지가 않는다. 어쨌든 주민센터에 가서 분한 마음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주섬주섬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니 아침 8시가 약간 넘었다. 현관 옆에 애완용으로 키우는 토끼가 반긴다. 자신을 반겨주는 건 이 토끼가 유일한가 싶어 A씨는 토끼 2마리를 상의 점퍼에 넣었다.

주민센터에 마침 어제 그 담당자가 나와 있다. 술도 취했겠다. 냅다 욕설과 함께 주민센터 공무원이 무슨 상전이냐고 그까짓 주민등록등본 하나 떼는데 툴툴대냐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공무원 B씨도 일과시간을 준비하다가 아침부터 봉변을 당하자 만만치 않은 대응을 한다. 그 와중에 A씨가 갑자기 상의 점퍼에서 토끼 2마리를 꺼내서 민원센터 안내데스크에 풀어 놓았다. 토끼는 주민센터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일과시간을 바로 앞두고 있던 공무원이 업무에 방해된다며 치워 달라고 요구했지만 "야, XX 놈아, 업무 시간이 아니니 못 치워 주겠다. 토끼를 잡아 먹던지 맘대로 해라. 내가 토끼 목을 잘라서 보내주겠다"라는 A씨의 말이 돌아왔을 뿐이다.

과연 A씨는 법적인 의미에서 주민센터 소속 공무원 B씨를 폭행하거나 협박했던 걸까? 그래서 결국 공무집행방해죄가 되는 걸까? 법원의 답변은 이랬다.

우선 공무원 협박에 해당하는지를 봤다.

"①A씨는 이 사건 당시 만 67세의 고령이었던 반면 주민센터 안에는 젊은 공무원들이 여럿 있었다. ②A씨가 이 사건 이전에도 자주 주민센터에 들렀기 때문에 그곳 공무원들과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③A씨는 과거 주민센터에서 욕설을 한 적은 있으나 공무원들을 폭행하거나 협박한 적은 없었다. ④주민센터 공무원들은 피고인의 말을 듣고도 피고인이 실제로 토끼 목을 자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공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사정에 비추어 A씨의 '내가 토끼 목을 잘라서 보내주겠다'라는 말은 단순한 불만의 표시나 감정적인 욕설에 불과할 뿐 공무원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느끼게 할 정도의 해악 고지라고 보기 어렵다." 공무원에 대한 협박이라 볼 수 없으므로 공무집행방해가 아니라는 말이다.

공무원 폭행에는 해당할까? 먼저 알아둬야 할 게 공무집행방해죄에서 폭행은 '공무원에 대한 직간접의 유형력 행사로서 공무원의 직무 집행을 방해할 만한 정도의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유형력의 행사라는 말이 어려운데, 정신적인 힘이 아니라 물리적인 힘을 쓴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겠다.

법원은 피해자 B씨가 토끼를 풀어 놓자 자신은 깜짝 놀라고 토끼가 무섭기도 해서 뒤로 피했지만 다른 여자 공무원들은 토끼가 무서워서 뒤로 피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증언한 것에 주목했다. 다른 공무원들도 토끼를 피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서워서 피한 것은 아니었던 것. 게다가 주민센터 공무원들이 얼마든지 토끼를 치워버릴 수 있었음에도 A씨와 마찰이 생길까 봐 경찰을 기다렸던 사정도 법정에서 밝혀졌다. 여기에 법원은 "A씨가 풀어놓은 동물(=토끼)이 통상 혐오감이나 공포심을 주는 동물이 아니라는 점"을 얹어서 A씨가 안내데스크에 토끼 2마리를 올려놓은 것을 두고 공무집행방해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뱀과 같이 혐오감을 주거나 맹견, 전갈과 같이 공포심을 주는 동물이야 모르겠으나 토끼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주민센터에서 항의하며 토끼 2마리를 풀어놓은 "피고인 A씨는 무죄".

이 판결은 광복 이후 최초로 "토끼는 혐오감을 주거나 공포심을 주는 동물이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판결이다.

[마석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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