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9 (목)

‘1100도’ 열기에도…폭염과 맞서 싸우는 ‘극한 노동자’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장마가 물러가고 가마솥더위가 시작됐다. 16일 전국 최고기온은 37.7도. 서울은 올해 첫 폭염 경보가 내려졌다. 밖에 서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 때문에 시민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이날 서울 주요 지역에서 측정한 온도는 차량 배기가스, 복사열 등이 겹치며 40도를 훌쩍 넘겼다. 17일에도 무더위가 이어졌다.
본보 취재팀은 폭염과 맞서 싸우는 ‘극한 노동자’ 5명의 일터 속으로 직접 들어가 ‘폭염 전쟁’을 함께 체험했다. 이들은 내리쬐는 햇볕과 작업장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1100도’ 열기에 맞서는 주물공장 장인, 가수의 꿈을 위해 인형 탈을 쓴 열여섯 소년, 지하 10m ‘더위 지옥’에서 철근을 나르는 건설 노동자, 휴게실에서 선풍기 하나로 버티는 지하철 청소노동자가 주인공들이다.

● “가수 꿈 위해…” 인형 탈을 쓰는 열여섯 소년
동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6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 앞. 회색 고양이 인형 탈을 쓴 이건희 군(16)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이 군이 더위를 식히려 잠시 인형 탈을 벗자 땀 냄새가 진동했다. 등 뒤 조끼에 달린 아이스 팩 3개가 눈에 띄었다. 더위를 견디기 위해 마련한 임시방책이라고 한다. 이 군의 등은 녹은 얼음물과 땀이 뒤섞여 흥건했다.
이 군에게 양해를 구하고 직접 인형 탈을 체험해봤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온몸이 땀범벅이 됐다. 5kg 무게의 인형 탈을 쓰자 아령을 머리에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인형 탈 내부는 땀에 젖은 털 때문에 답답했고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호흡이 가빠지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탈을 벗은 뒤 멍하니 계단에 주저앉았다.

이 군도 얼마 전 이 일을 하다 5분동안 거리에 쓰러진 적이 있다. 무더위 속에 버티다 순간 정신을 잃은 것이다. 다행히 근처 시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깨어났다. 위험하지만 인형 탈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지 못한다. 매일 4시간씩 주 5일간 일한다. 아이돌 가수의 꿈 때문이다. 그는 한 대형기획사에서 수업을 들으며 춤과 노래를 배운다. 월 수강료는 90만 원. 학교를 자퇴한 이 군은 학원비와 생활비를 손수 벌어야 한다.
편의점이나 카페에서는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다. 그가 미성년자인 탓이다. 시급도 최저임금 수준이다. 인형 탈을 쓰면 현행 최저임금보다 높은 시급 8000원을 받을 수 있다. 이 군은 “기획사 수업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연습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오늘 같은 무더위에도 인형 탈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땀으로 축축해진 인형 탈을 다시 얼굴에 쓰며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 ‘1100도’ 열기에 맞서 싸우는 주물공장 장인
동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후 3시 서울 중구의 7평 남짓한 한 주물공장. 입구에 들어서자 뜨거운 불가마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작은 공장 안에서는 김모 씨(60)가 벌건 쇳물을 바가지로 퍼 올렸다. 그는 1100도가 넘는 쇳물의 열기와 매일 맞서 싸우는 40년 경력의 장인이다. 쇳물을 퍼낼 때 실내 온도는 40도를 넘는다고 한다. 김 씨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열기 속에서 김 씨가 삽으로 흙을 퍼 거푸집을 덮었다. 뿌연 흙먼지가 공장 안을 가득 매웠다. 시야가 흐려지지만 집중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칫 작은 불순물이라도 용광로에 들어가면 폭발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 김 씨의 양 팔에는 화상 자국들이 가득했다.
폭염에 쇳물의 열기까지 그를 괴롭히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다. 김 씨는 “에어컨 바람도 소용이 없어 잠시 얼굴을 에어컨 가까이 대고 더위를 식히는 게 전부입니다. 대한민국 산업 역군으로 일해 온 자부심 하나로 이 더위도 버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더위 지옥’ 지하 10m에서 철근 나르는 건설 노동자
동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후 1시 반 서울 강남구의 한 빌딩 건설현장에서 강모 씨(40)가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철근 구조물로 가득한 지하로 내려갔다. 그는 무거운 쇳덩이를 나르는 ‘철근공’이다. 햇빛이 닿지 않는 10m 깊이에서 철근을 나른다. 이곳 아래는 바람이 통하지 않아 숨이 턱턱 막힌다. 강 씨는 햇볕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제외하고는 온몸을 천으로 감싼 상태였다. 둥그런 모자와 목토시, 팔토시, 긴 등산 바지, 두꺼운 작업용 안전화로 ‘완전 무장’을 한 것만으로도 더위가 느껴졌다.
이 때문에 이 현장에는 제빙기를 설치해두고 포도당 알약을 배치해둔다. 폭염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 탈진 증상을 보이는 노동자들이 많아서다. 이날은 이미 두 통의 포도당 알약 통이 텅텅 비어 있었다. 건설 현장의 한 관리자는 “오늘처럼 폭염경보가 발령된 날은 일하는 분들이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 지하 휴게실 선풍기 하나로 버티는 지하철 청소노동자
동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할 때는 물론 쉴 때도 더위와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송모 씨(55·여)는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지하철역에서 쓰레기를 치운다. 장갑과 안전화, 마스크를 착용한 채 쉴 틈 없이 1시간 반을 돌아다니며 청소한다. 유동인구가 많아 20분이면 쓰레기통이 가득 찬다. 송 씨는 머리에 손수건도 매고 있었다.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안 싸매면 땀이 눈으로 흘려 내려가 너무 따가워진다”고 말했다.
‘테이크아웃 커피’가 일상화되며 쓰레기통에 버려진 일회용 컵을 처리하는 일이 가장 고되다. 커피가 든 일회용 컵을 버리는 시민들이 많아서다. 송 씨는 일회용 컵을 하나하나 분리해 남은 커피를 양동이에 부어 담았다. 어느새 양동이 두 바가지가 커피로 가득 찼다.

쉬는 시간에도 더위와의 사투는 계속된다. 지하 1층 휴게실에는 6명의 청소노동자가 앉아 있었지만 선풍기 한 대가 전부다. 지하 공간이라 바람이 통하지 않는다. 휴게실 양 옆에는 남녀 화장실이 있어 오물 냄새까지 안으로 들어오는 악조건이다. 지하철 정규직 직원 샤워실이 있지만 눈치가 보여 사용을 하는 것도 어렵다. 송 씨는 “선풍기 한 대로는 역부족이라 아예 콘센트를 뽑아 놓아두는 경우가 많다. 쉴 때만이라도 땀을 식히며 제대로 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이윤태 인턴기자 연세대 사학과 4학년
박희영 인턴기자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과 졸업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