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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제주4·3 타국살이' 90대 노인이 바라본 예멘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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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대·토벌대 피해 일본행…"고향 강제로 떠나고 싶은 사람 없어"

"어려움 처한 사람들 도와줬으면"…차별에 함께 맞선 일본인엔 ‘고마움’

제주CBS 고상현 기자

노컷뉴스

4.3 당시 무장대, 토벌대를 피해 일본으로 밀항했던 강영일(93)씨가 16일 제주시 월평동 자택에서 최근 예멘 난민 수용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대해 아쉬운 심정을 내비쳤다. (사진=고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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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예멘 난민 수용 거부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70만 명이 넘는 등 난민 수용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거세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제주4·3 등으로 타국에 몸을 기대야 했던 아픔을 겪은 만큼 이들을 보듬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CBS노컷뉴스는 제주4·3 광풍을 피해 일본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던 강영일(93)씨를 직접 만나 예멘 난민 논란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4·3 당시 어머니가 전 재산 팔아 밀항선에 태워"

해방 이후 제주지역 자치 기구였던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하던 21살의 강씨에게 죽창을 든 낯선 남성들이 찾아온 건 1948년 4월. 무장대가 경찰서를 습격한 지 얼마 안 돼서다.

중산간 마을인 제주시 월평동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강씨는 이들로부터 "며칠 내로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말을 들었다.

흔히 '산 사람'으로 불리던 무장대는 4·3 당시 밤중에 마을을 돌며 젊은이를 무장대원으로 쓰기 위해 데려가거나 양식을 약탈하곤 했다.

특히 무장대의 근거지인 중산간 마을 주민이자 20대 청년이었던 강씨는 해안지역 마을에 내려가 살 수도 없었다.

무장대로 오해를 받아 군경 토벌대에게 희생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강씨의 어머니는 외아들인 강씨를 헛되이 잃을 수 없어 전 재산이었던 소를 팔아 아들을 일본행 밀항선에 태웠다.

강씨는 16일 제주시 월평동 자택에서 CBS노컷뉴스 취재진에게 "제주에 남으면 어떤 식으로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본으로 가는 것밖에는 살 길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밀항선이었던 50t 규모의 비좁은 고깃배에 타 보니 나와 같은 처지의 제주청년 100여명이 있었다"며 "살기 위해 고향을 등져야 하는 슬픔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씨처럼 4·3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떠난 이들은 5000명~1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모두 내전을 피해 제주에 들어온 예멘 난민들처럼 청‧장년층 남성이 대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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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가 일본 생활 시절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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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인이라며 무시"…차별에 함께 맞선 일본인엔 '고마움'

일본으로 가는 도중 태풍을 만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일본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의 벽에 부딪혀야만 했던 것.

강씨는 "식민 지배를 받아서인지 한국 사람을 대놓고 '반도인'이라고 부르며 무시했다"며 "특히 대부분 막노동을 하며 근근이 생활했던 터라 깔보고 차별하는 게 상당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강씨처럼 4·3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제3국민'에겐 취업의 기회가 자국민과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강씨는 낮에는 재단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를 다니며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강씨는 어렵게 오사카의 한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제3국민에게 변호사 시험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한 후에는 오사카 등지에서 적은 월급을 받고 중‧고등학교 강사, 신용조합 등의 일을 하며 여섯 식구와 함께 근근이 살아갔다.

강씨가 일본인들의 차별 속에서 어렵게 살았지만 일부 일본인들 중에는 차별에 함께 맞서 싸워준 사람들도 있었다.

강씨는 "외국인 등록증을 받거나 추방 위기 속에서 도와준 이들이 인권변호사, 지식인들이었다"며 "아직도 그 마음이 고마워 수첩에 이들의 이름과 함께 사무실 주소를 적어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 "강제로 고향 떠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다"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방송과 신문을 통해 사회 이슈를 접한다는 강씨 역시 최근 내전을 피해 제주에 들어온 예멘 난민 소식을 알고 있었다.

강씨는 특히 이슬람 혐오를 바탕으로 예멘인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센 분위기에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

강씨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나고 자라온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며 "어쩔 수 없이 타국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내쫓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어 "우리도 한국전쟁, 4·3 당시 타국에 의지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며 "후대의 사람들이 이 역사를 기억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꼭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강씨는 취재진에게 고향을 떠난 지 51년 만인 지난 1999년 제주에 들어온 후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씀을 얘기했다.

"어머니께서 나를 떠나보낸 후 매일같이 아들의 무사를 바라는 기도를 드렸다는 말에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현재 제주에는 4·3 당시 강씨처럼 어머니가 전 재산을 팔아 제주로 보낸 예멘 난민 H(18)군이 기계공학도를 꿈꾸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H군의 어머니는 아들이 내전으로 죽는 것이 걱정돼 제주로 보낸 뒤 자신은 폭격과 함께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예멘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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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집을 피해 홀로 제주에 들어온 예멘 난민 H(18·맨 왼쪽)군이 지난 달 22일 제주외국인이주민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받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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