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진의 어쩌다 집사]
(20) 인테리어 파괴자
평범한 집사의 거실. TV 테이블 밑의 호피무늬 스크래처는 고양이 스크래처계의 베스트&스테디 셀러다. 우측에 보이는 분홍색 물건은 겨울용 터널. 그 외 어디에나 널브러져 있는 각종 장난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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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렵게 구한 자취방에는 공포의 체리색 몰딩와 초록색 창틀이 있었다. 공간도 생각보다 너무 좁았다. 꿈꾸던 인테리어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 작은 방이 집으로서 기본적인 기능을 하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나의 첫 자취는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며 시작됐다. 포기한 건 아니었다. 2년 뒤 이사 가는 집에서는, 어떻게든 지금보단 잘 해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책장 꼭대기를 자꾸 올라가기에 아예 스크래처를 올려주었다. 밀려서 떨어질까봐 양면테이프로 고정시켰다. 나무는 저 위에 올라가 누나가 아끼는 사진들을 걸어둔 철망을 시도 때도 없이 떨어뜨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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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사는 집은 티가 난다. 어린 아이가 자라는 집 거실엔 뽀로로 블럭 매트가 깔려 있고 식탁 모서리마다 실리콘 보호장치가 끼워져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뽀로로 매트는 애가 자라면 치울 수나 있지. 고양이에게 필요한 물건들은 지금이나 10년 뒤나 딱히 달라질 일이 없다.
모든 집사의 집에 공통적으로 있을 법한 요소는 일단 화장실이다. 사람만 사는 집에는 있을 리가 없는 모래 담긴 화장실이 한 개 이상 꼭 필요하다. 수요가 많은 제품인만큼 나름대로 다양한 디자인이 있긴 한데… 예뻐봤자 화장실이다. 그리고 쓰다 보면 중요한 건 디자인보다 기능이다. 우리집 가구 색깔과 잘 맞는다고 고양이가 불편해하는 화장실을 쓸 수는 없다. 고가의 제품은 좀 나을까 싶지만 비쌀수록 디자인은 점점 SF장르가 된다. 자동으로 대소변을 치우고 모래날림을 최소화하는 등 최첨단 기능을 탑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근한 누나 대신 나무의 식사를 챙겨주는 자동배식기. 처음 택배상자에서 꺼낼 때 생각보다 크기가 너무 커서 당황했다. 나무는 이미 하루치 식사가 끝난 뒤에도 배식기 옆에 딱 붙어서 오매불망 밥을 기다리곤 한다(누나 보라고 일부러 저러는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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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좁은 집이 아니라면 또 안 살 수가 없는 게 캣타워다. 고양이는 높은 곳을 좋아하고 수직적인 이동을 즐기기 때문에 오르내릴 수 있는 구조물을 꼭 갖춰주는 게 좋다. 캣타워도 그 종류가 매우 많고 크기와 재질이 다양하다. 합판 구조물에 벨벳 느낌의 인조모피를 뒤덮은 제품들이 저렴하지만 내구성이나 위생 면에서 좋지는 않다. 알록달록한 색감도 진입장벽이다. 튼튼하고 디자인이 깔끔한 제품은 대개 원목 재질이다. 고로, 비싸다. 큰맘 먹고 수십만원 짜리 원목 캣타워를 산다고 해도 그 거대한 물건이 집에 잘 어울리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다보탑이 국보라고 해서 굳이 집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은 것처럼….
이처럼 집사는 철저히 고양이의 습성과 행동반경을 기준으로 공간을 채운다. 감각적인 디자인을 내세운 제품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 선택의 제1기준은 기능성이다. 그 다음은 가격. 경제력이 평범한 집사가 고양이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합리적인 가격에 사모으다 보면 어느새 파괴된 인테리어와 마주하게 된다.
나무의 여름용 터널. 바스락거리는 재질이라 유독 좋아한다. 인테리어 파괴의 1등 공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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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친구들과 대화에 참여하는 척하면서 호시탐탐 테이블 위 안주를 노리는 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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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꿈의 인테리어란 수시로 바뀐다. 내 취향도 달라지고 유행도 흘러간다. 나무와 함께 살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 내 집은 나무만 있으면 완성된다. 지난번 집의 끔찍한 초록색 창틀도 나무가 올라가 앉으니 그림같았다. 쓰고 있을 때 편한 콩깍지는 굳이 벗을 필요가 없다. 나의 나무. 내 집 인테리어를 박살내러 온 나의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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