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좀 전에 뭐라고 하셨지요?” 폭력 앞에선 ‘급정색’ 괜찮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한겨레

“저 좀 도와주세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럴 땐 친구나 애인, 선생님과 부모님, 내 옆을 지나가던 낯선 타인, 네티즌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나 역시 기꺼이 돕는 사람이 되어 나의 시간과 재능을 내어주고 싶다. 길을 잃었을 때 알려주기,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기, 말하기 어려운 고민 들어주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일 앞에서 합리적인 의견 내주기, 더 많은 도움을 연결해주기, 위로해주기, 공격을 물리쳐주기….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도움과 도움들 사이에서 산다.

도와주기로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상대의 마음이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때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얼마나 큰 어려움인지 호소하고 싶기도 하다. 최대한 밝게 웃으면서 공손한 몸짓을 보일 수도 있고, 절박한 사정을 말하고 낮은 자세로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상대방이 내 요청에 응하여 도움을 주게 된다면 자연스레 고마운 마음이 들어 그것을 표현하게 된다. 진실한 마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할 수도 있고,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됐는지, 덕분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는지를 말해줄 수도 있다. 나도 다른 사람들 일에 이렇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고, 감사 선물을 할 수도 있다.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받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동안 요청한 만큼의 선의가 되돌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용해 성적인 침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관계가 아닌데도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뽀뽀를 해달라거나,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외진 곳에서 만나야 한다거나,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도움과 무관한 성적인 공격을 한다면 애초에 그것은 도움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접근이다.

그런데 고마운 마음을 전하던 웃음기를 재빨리 거두고 이른바 ‘급정색’으로 얼굴색을 바꾸는 데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급정색’ 하는 사람을 보고 무안하거나 감정적으로 불안해졌던 적이 있어 그런 행동은 더욱이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상황이 달라졌으므로 새롭게 진지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지해질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화기애애한 순간이라도, 위험과 침해가 느껴진다면 상황은 중단돼야 한다. “좀 전에 뭐라고 하셨지요?”라고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도 있고, “이건 성폭력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다. 도움과 공격행위는 서로 전혀 상관이 없는 두 가지 일이므로 공격행위가 일어날 때는 도움을 받는 중일지라도 모든 상황을 중단할 수 있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난 뒤에 우리는 새롭게, 사람들의 이타적인 마음을 믿으면서, 다시 한 번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누구나 도움을 주고, 누구나 도움을 받으면서 산다.

문미정(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우리학교) 지은이(공저))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오늘의 추천 뉴스]
[▶ 블록체인 미디어 : 코인데스크] [신문구독]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