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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준익 감독이 그리는 ‘꼰대’ 없는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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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영화 <변산>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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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이라는 지명과 그 옆에 붙은 ‘스왜그’라는 카피가 서로 그다지 사맛디 아니함으로써 이건 대체 뭔가 싶은 궁금증 자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 <변산>. 이 영화는 일단 이준익 감독의 팬들에게는 일종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감독 특유의 요소들이 종합져 어우러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그 특유의 요소들이란 ①사투리 ②음악(또는 뮤지션) ③청춘 ④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⑤마지막 공연 등이다.

우선 ①사투리. <황산벌>(그리고 <평양성>)은 김유신, 김춘추, 의자왕, 계백 등 교과서 및 한국을 빛낸 100인들에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들이 농밀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최소한 당시로선) 매우 기발한 설정을 선보임으로써, 영화에 붙은 장르명 ‘코믹 사극’이 코믹 역사극이 아닌 코믹 사투리극의 준말이라는 학설이 제기된 바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황산벌>은 사투리가 거의 6할은 먹고 들어가는, 사투리가 또 하나의 주인공인 영화였다 할 것이다.

사투리 쓰는 래퍼

<변산>은 이 열두 번째 선수―사투리의 전통을 이어간다. 단, 역사 속 인물 아닌 래퍼를 통해서. 홍대 앞 무명 래퍼인 주인공 ‘학수’(박정민)는 작은 클럽에서―열 명 간신히 넘는 관객들 앞에서―자신만의 외로운 싸움 즉 공연을 하면서―편의점 알바, 발레파킹 등등으로 생활을 유지하면서―1.5평 고시원에서 쪽잠을 자면서―각과 갑빠와 세상 향한 분노 불타는 도끼눈만큼은 절대로 풀지 않는―절대로 풀 수 없는―이 시대의 고독한 승냥이적 스왜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그가 고향 친구를 마주쳐 엉겁결에 단말마의 호남 사투리를 흘리는 장면은 방심한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뒤집으며 예전 <황산벌> 개봉 당시에 준하는 코믹 효과를 재현해내고 있다. 그렇다. 래퍼 학수와 김유신-김춘추는 역사문화경제정치사회적 거리에서 대단히 멀어 보인다만, 사투리적 관점에 입각해서 본다면 둘은 전혀 다르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사투리는 당연히도 학수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은 학수가 고향 변산에 내려간 영화 초반 이후로 영화는 호남 사투리의 갯벌에 온몸 던진다. 예전 조폭영화가 한국영화를 지배하던 시절엔 흥행 필수 아이템이었지만 곧 메뚜기 떼 지나간 옥수수밭처럼 황폐해져버리고 만 사투리를, 조폭도 아닌 민간인 대화에서 구수하고도 차지게 되살려낸 <변산>의 시도는 충분히 참신하다. (아, 물론 <변산>에서도 학수의 초등학교 동창인 ‘용대’(고준)라는 건달이 등장하긴 한다만, 그의 조폭 행위는 어디까지나 소주잔 속 태풍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도 약점은 있다. 상영시간 대비 약발 저하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래퍼의 사투리’가 주는 신선함은 그것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점, 즉 학수가 처음으로 사투리를 내뱉는 시점인 상영시간 약 7분 경과 시점에 최대치를 기록한다. 그러니까 상영시간은 아직 4분 빠진 2시간이 남아 있고, 그동안 사투리는 점차 관객의 귀에 익으면서 자연스럽게 약효가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대개의 화려무쌍한 컴퓨터그래픽(CG)들이 그러하듯. 아이맥스 3D가 그러하듯.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변산>의 선도유지제는, 이 영화의 실질적 척추라 할 ③청춘이라는 요소다.

뭐, 이 자리에서 굳이 현재 한국 청춘들의 암담함과 좌절과 분노에 대해 새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변산>은 청춘을 논하는 영화에서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청춘세대의 절망의 대변’이라는 사회적 책무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지극히 사소하다면 사소한, 개인적이라면 개인적인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청춘 세대의 좌절·분노 대신
사소하고 개인적인 사건에 초점
억지 감동, 꼰대 설교 없고
어설프지만 유쾌한 에너지

아버지와의 갈등 해소
마지막 공연 장면의 결론
다소 도식적이지만
생명력 포착한 감독의 눈 놀라워


특히 <변산>은 커다란 플롯보다는 인물 중심의 자잘한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그물처럼 짜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복구할 수 없도록 완전히 지워버리고픈 기억을 학수에게 남긴 학수의 첫사랑이자 우리 동네 수석 미녀인 ‘미경’(신현빈), 그녀의 연인을 자처하는 왕년 교생 선생 겸 지역신문 기자 겸 학수를 표절해 문학상을 탄 도둑놈 ‘원준’(김준한), 그리고 그의 오른팔을 자처하다가 한순간 상황을 뒤집고 또 뒤집으며 학수에게 당했던 소싯적 치욕을 갚아주는 동네건달 ‘용대’, 그리고 첫사랑 학수를 고향 변산으로 불러들인 뒤 그의 주변을 맴돌면서 종종 들이대기도 하고 종종 들이박기도 하는 지역 공무원 겸 소설가 ‘선미’(김고은) 등등, 학수와 그 주위의 인물들이 흡사 브라운 운동 하듯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변산>이라는 그림 전체가 만들어진다. 덕분에 <변산>의 인물들은 청춘에 관한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레고블록으로 전락하는 대신 개성 및 생동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긴 하다. <변산>의 이야기 전개는 분명 예측 불허의 브라운 운동이긴 하되, 크게 보면 정해진 틀―‘순수한’ 애정은 응답받고, 해묵은 갈등은 끝내 어떻게든 풀린다―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하자면 밀폐용기 안에서 일어나는 브라운 운동(액체 혹은 기체 안에 떠서 움직이는 작은 입자의 불규칙한 운동)이다. 더하여, 이야기 전개에 ‘우연히’와 ‘때마침’이 너무 자주 등장하는 경향 또한 없지 않다.(영화 스스로가 먼저 나서서 멋쩍은 듯 “변산 바닥이 워낙에 좁잖어”라는 선미의 대사로 해명하고 있긴 하다만.)

하지만 앞서 말했듯 <변산>의 관심사는 큰 줄기의 박력보다는 자잘한 가지들의 아기자기함과 디테일에 있다. 그리고 이 디테일은 관람 도중 그런 빠지는 점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도록 할 만큼 충분히 밀도 있고 유쾌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그리는 방식

그런데 <변산>의 인물들 중, 이 영화를 고향 친구들의 시끌벅적 추억담 및 연애담으로부터 한 발 더 나가게 하는 인물이 있다. ④학수의 아버지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준익 감독은 이미 <사도>를 통해 아버지에게 삶을 짓눌린 아들과 그의 분노, 그들 간의 복잡미묘한 애증을 본격 다뤘는데, <변산>에서는 이것이 ‘병약해져버린 아버지 대 아버지보다 커버린 아들’이라는 훨씬 단순화된 버전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사도>와는 달리 <변산>의 아버지-아들의 관계는 아들인 학수의 시점에 맞춰져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이름난 벌교 건달이었지만 가족(학수와 엄마)에게는 쪽팔림, 모멸감, 그리고 곤경만 안겼을 뿐인 아버지(장항선)에 대한 학수의 원망과 분노는, 어쩌면 현재의 청년세대들이 기성세대에 대해 느끼는 반감 및 분노를 은밀히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보이기도 한다. 만일 그렇다면 “너도 결국 니네 아버지랑 똑같은 놈이여”라는 선미의 대사나 “잘 사는 게 복수여”라는 아버지의 대사(이들 또한 닳도록 입에 오르는 대사들이다. 영화에서건 현실에서건)는 현재 청년세대가 자칫 빠질지도 모를 함정에 대한 영화의 우회적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과잉해석일지도 모르는 이러한 의역 없이도, 영화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영화 곳곳에 깔리는 학수의 랩, 그리고 짤막짤막한 시구절들을 통해서 말이다. 맞다. 일찍이 마크 레빈의 <슬램>이 제대로 보여주고 널리 알렸듯(그리고 얼마 전 짐 자무시도 <패터슨>에서의 짤막한 장면을 통해 얘기했듯), <변산>의 함량 높은 랩들은 랩과 시의 뿌리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뭐, 사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굳이 <쇼미더머니> 같은 기존 티브이(TV)쇼를 영화에 수미쌍관 도입하여 영화 전체를 묶어주는 괄호처럼 사용하면서, 이를 주인공의 성장 또는 성취를 보여주는 무대 겸 화려한 해피엔딩의 장으로 활용하지 않았어도. 사실 이런 설정은 <변산>의 매력의 핵심이 일상의 구수함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소 도식적으로 보인다. 또한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를 다분히 연상시키는 클로징 군무 장면에서 드러나는 결론 또한, 학수와 아버지의 갈등 해소 과정만큼이나 판에 박힌 것이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변산>에는 오케스트라를 동반한 5분간 눈물압출공정 같은 것은 없다. 꼰대스러운 설교도, 못내 심각한 분석이나 고발도 없다. <변산>의 청춘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거나,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그런 카인드 오브 청춘이 아니다. 대신 <변산>의 청춘은 청춘만의 특권인 어설픔과 한심함, 풋내와 에너지, 그리고 유쾌함과 낙천성이 생물낙지처럼 ‘힘빨’ 좋게 살아 움직이는 그런 청춘이다. 그리고 그 생명력을 포착해낸 것은 다름 아닌 1959년생 감독의 눈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변산>은 놀랍다. 항시 볼 수 있지만 볼 때마다 항시 놀랍다는 변산의 노을만큼이나 놀랍다.

덧붙여서 영화에 등장하는 ‘상금 1억짜리 문학상’이 멸종된 지는 꽤 오래되었다. 모쪼록 소설가 지망생 여러분들의 착오 없으시길.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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