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8 (화)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8] 독일 베를린 한복판 우뚝 선 프랑스 교회… “관용을 베풀라” 하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교회

조선일보

“종교의 자유를 잃은 모든 자여, 우리에게 오라. 시민권은 물론이고 농지와 집, 일자리와 정착 자금까지 대주겠다. 이곳이 너희의 새로운 조국이 될 것이다.”

1685년 11월 8일, 독일의 전신(前身)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선출권을 가졌던 일곱 개의 제후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칙령 하나가 발표됐다. 프랑스에서 종교의 자유를 잃고 쫓겨나게 된 위그노(프랑스의 신교도)를 대상으로 한 칙령이었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위그노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의 칙령을 폐지한 지 20일 만이었다.

이때 브란덴부르크의 군주는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1620 ~1688년)이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이미 '대선제후(Great Elector)'라 불린 위대한 리더였다. 낭트의 칙령 폐지로 프랑스에서 내쫓기기 시작한 위그노들은 보잘것없는 난민이 아니라 유럽 최고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었다. 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척박한 나라 브란덴부르크의 군주로, 평생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을 품고 질주했던 대선제후에게 이들은 소중한 자산임이 분명했다. 그는 위그노들에게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제도적, 물질적 특혜를 제공했다. 예배를 프랑스어로 드릴 수 있는 권리와 위그노만의 교회 설립까지 약속했다. 대선제후의 정성이 위그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베를린으로 위그노들이 몰려들었다. 그 수가 2만명에 달했다. 프랑스를 떠난 전체 망명자(20만~90만명)에 비하면 소수였으나 브란덴부르크 입장에서는 감지덕지할 만했다.

유럽 최고의 광장 젠다르멘마르크트

오늘날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는 이런저런 광장을 품고 있다. 중세 때부터 도시의 주요 기능과 시민들의 삶이 광장을 중심으로 꽃피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도 파리 광장, 포츠담 광장, 라이프치히 광장 등 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나 수많은 베를린의 광장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젠다르멘마르크트(Gendarmenmarkt)'다. 베를린을 대표하는 콘서트홀의 하나인 콘체르트하우스와 두 개의 웅장한 교회가 삼면에서 광장을 품고 있다.

조선일보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광장은 각각 관용의 상징인 두 교회를 품고 있다. 젠다르멘마르크트의 프랑스 교회(위 사진 오른쪽 건물)와 베벨플라츠의 성 헤트비히스 성당(아래 사진 중앙 건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광장 한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건 대시인(大詩人) 실러의 동상이다. 화려하기보다는 우아하고, 시끌벅적하지 않고 차분하다. 노천카페의 커피 맛도 특별하고, 거리의 예술가들이 선보이는 길거리 공연에서도 격조가 풍긴다. 유럽 전체로 시야를 넓혀도 이만큼 멋진 광장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젠다르멘마르크트는 기품 있다. 아마 이곳이 품고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나의 선입견일 수도 있다.

베를린에 갈 때마다 이 광장을 찾는 이유는 광장에 들어선 두 개의 교회 중 북쪽에 있는 '프란최지셔 돔(Franz

ö

sischer Dom)' 때문이다. 이름부터 특이하다. 프랑스 교회!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 왜 프랑스 교회가 자리 잡고 있는 걸까? 바로 대선제후가 칙령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잃은 프랑스 위그노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그들만의 교회를 지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대선제후는 왜 그랬을까?

강대국만을 꿈꾼 리더의 결단

조선일보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162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30년 전쟁(1618~1648년)이란 파괴적인 종교전쟁이 시작된 직후였다. 구교와 신교의 종교적 대립,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간의 패권 다툼 등이 얽히면서 전쟁은 비극으로 치달았고 소국(小國) 브란덴부르크를 휩쓸었다. 강대국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국토는 짓밟혔고, 백성들은 죽어나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어린 시절도 가난하고 힘들었다. 그는 힘없는 나라의 설움과 그런 나라 백성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체험했다.

1640년, 무기력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제후에 올랐을 때 그의 꿈은 오직 하나, 강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1648년 평화가 찾아왔다. 선제후는 나라를 재건하고 강하게 만든다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쉬지 않고 달렸다. 강대국 사이를 오가며 곡예 외교를 했고, 귀족의 특권을 억누르고 강한 상비군을 길렀다. 각종 산업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 물적 교류 확대를 위한 운하 건설, 농지의 개간, 무인(無人) 지역으로의 조직적인 식민 활동 등 대선제후는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30년 전쟁으로 잃은 인구는 단기간에 복구되지 않았다. 각종 산업, 교역, 개척을 이끌 엘리트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선제후는 집권 초기부터 우수한 인재를 외부에서 끌어들여 낙후된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데 주력했다. 그 전략이 성공하려면 사회 전체적으로 외부인을 받아들이고 포용할 관용의 정신과 열린 마음이 필요했다. 대선제후는 '관용'을 국시(國是)로 내걸었다. 관용이 성장을 가져올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프랑스의 위그노를 끌어들인 것도 이런 전략의 연장선에서였다. 그의 예상대로 위그노는 지지부진하던 브란덴부르크의 각종 산업과 농업, 교육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관용을 상징하는 교회들

조선일보

대왕 프리드리히 2세


대선제후는 1688년에 죽었다. 위그노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 2년 6개월 후였다. 위그노에게 교회를 지어주겠다는 약속은 후계자에게 넘겨졌고, 현명하게도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젠다르멘마르크트의 프랑스 교회는 그렇게 태어났다. 오늘날 이 교회는 독일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위그노 공동체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면 대선제후가 얼마나 대단한 리더였는지 알게 된다. 강력한 국가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제대로 된 후계자와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한 이유다. 그런 면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운(運)이 좋았다. 각자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대선제후의 초심과 목표를 잊지 않는 리더들이 계속 배출됐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Ⅱ·재위 1740~1786년)의 등장으로 '운'은 '운명'이 됐다. 젠다르멘마르크트를 벗어나 프랑스 거리를 건너면 베벨플라츠(Bebel Platz)라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광장이 나타난다. 거리와 광장 사이에 또 하나의 웅장하고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는 건물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데, 성 헤트비히스(St Hedwigs) 성당이다. 베를린 가톨릭의 본산인 이 성당은 1747년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건립이 시작됐다. 왕이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슐레지엔이란 부유한 영토를 강탈해 온 직후였다.

중견 국가 프로이센(18세기 들어서면서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으로 불렸다)이 강대국 오스트리아와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대선제후 이후 축적된 국력과 프리드리히 2세의 탁월한 리더십과 더불어 많은 슐레지엔 신민들이 같은 신교를 믿는 프로이센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지역에도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슐레지엔을 오스트리아로부터 지키려면,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왕은 알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베를린 한복판, 왕궁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슐레지엔의 가톨릭교도들을 위한 교회를 짓기로 했다. 교회 부지는 왕이 기증했고, 슐레지엔의 수호성인인 성(聖) 헤트비히스의 이름을 붙였다. 외관은 '관용'과 '제국'을 상징하는 로마의 판테온을 따랐다. 그 후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되찾고자 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도를 여러 차례 무산시켰다. 모든 주민들의 마음까지 얻었던 덕분이다.

5분이면 볼 수 있는 베를린의 진면목

조선일보

젠다르멘마르크트의 프랑스 교회에서 베벨플라츠의 가톨릭 성당까지 가는 길은 가깝다. 주변을 둘러보며 느릿하게 걸어도 5분이면 족하다. 두 교회 모두 멋지고, 교회가 면한 광장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걷는 동안 마음을 움직이는 건 교회를 만든 관용의 정신이고, 강대국을 향한 전략적 리더십이다. 베를린은 오랜 세월 보잘것없는 소국의 수도였으나 대선제후와 프리드리히 2세를 거치면서 역사의 중심이 됐다. 이런 사연을 모른다면, 베를린을 수차례 다녀와도 껍데기만 보는 것 아닐까?

["유대인도 받아들여라"… 열린 사회가 세계사 주도]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위그노 외에 유대인도 적극 받아들였다. 반대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강국 건설에는 금융·산업·지식 분야에서 탁월한 유대인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늘 핍박받는 민족이었기에 종교의 자유, 사회적 관용, 법에 의한 보호, 재산권 보장이 없는 곳에서 살아갈 수 없다. 대선제후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이때부터 브란덴부르크는 독일의 주도 국가로 발돋움했다.

베네치아,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역사를 선도하고 세계 제국을 건설한 모든 국가가 자국 내 유대인과 운명을 같이했다. 유대인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유대인도 살 수 있는, 열린 사회를 만든 덕분이다. 미국이 20세기 이후 세계사를 주도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베를린=송동훈 문명탐험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