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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매경이 만난 사람] 도시재생 전문가 피터 허시버그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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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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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설계자들은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완벽하게 지어놓고 나면 시민들이 아무 불만 없이 만족하는 공간을 지향한다. 하지만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할 때는 가급적 많은 실패(사례)가 필요하다.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기존에 있던 도시를 재창조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또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 도시만의 고유한 재생 모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의 혁신적 '메이커'들이 가급적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도시재생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내고, 동시에 함께 진화하는 '메이커 시티' 개념이 필수적이다."

이른바 '최소 시간에 최대 실패를 생산할 수 있는 도시' 모델. 이 같은 도전적 환경에서 다양한 도시 실험이 탄생할 수 있고 그 결과 창조적 도시 모형이 보다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메이커 시티'의 철학이다. 도시재생 프로젝트 '메이커 시티'를 이미 미국 100여 개 도시에서 활발하게 도입했다. 도시 주창자 중 한 사람인 피터 허시버그는 지난달 28일 서울 역삼동 한 공유 오피스에서 재단법인 여시재 도움으로 매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도시는 이제까지 본질적으로 실패를 기피해 왔지만 이제는 그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허물어져 가는 과거 제조업 중심 도시(Rusty Belt)를 살리기 위해서는 도시가 실패를 장려하고, 심지어 실패를 끌어내기 위해 돈까지 투자하는 도시 모델을 만들어 일부 도시에 적용해 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메이커 시티' 개념은 자신에게 필요한 제품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자발적 혁신 발명가들, 이른바 '메이커'들이 각종 설계도면이나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도시 모형을 뜻한다.

미국에서 시작한 이런 '메이커 시티' 운동은 다양한 결과물을 낳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자동차회사 포드는 디트로이트 본사에 직원을 위한 '메이커 스페이스'를 만들어 각종 실패를 장려했다. 허시버그는 "그 결과 직원 수천 명이 새로운 발명품을 내놓기 시작했고 오늘날 포드는 어느 자동차회사보다 특허를 많이 보유하게 됐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인 '마켓스트리트' 재생 계획에도 '메이커'들이 관여하고 있다고 그는 소개했다. 그는 "건축가들이 이 거리를 재생하는 작업을 주도했다면 약 30년 걸렸을 일을 메이커들이 50개 정도 프로젝트로 나눠서 진행하며 효율적으로 도시재생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메이커'들 힘을 활용해 죽어 가는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은 사례로 그는 피츠버그를 꼽았다.

허시버그는 "철강 도시였던 피츠버그는 메이커 시티 운동을 통해 소프트웨어·로봇·교육 중심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피츠버그의 모든 중학교는 '메이커'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며 "그 결과 어린 학생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고 2학년이 낸 아이디어를 8학년 학생이 제조물로 현실화하는 등 다양한 협업 공간으로 도시가 거듭나고 있다"고 소개했다. 피츠버그에 있는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에는 한 건물을 오픈 소스 형태로 공개하고 제조물 프로토타입을 제작해 바로 스타트업 투자까지 한 건물에서 이뤄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기도 했다. 캔자스시티에서는 '캔자스시티 스타'라는 지역 신문이 '메이커 시티'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신문사가 나서서 3D 스캐너와 메이커들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고 각 학교에 공기 오염 센서를 도입하도록 독려했다"며 "그 결과 시민들이 도시 개발에 관심을 쏟게 되었으며 함께 도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프로토타입을 만들려는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메이커 시티'는 '메이커'들 힘을 통해 죽어 가는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도시재생 작업이다. 허시버그는 "대도시와 중소 도시 간 불균형 문제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등 전 세계적 문제와 직결돼 있다"며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혁신을 어떻게 하면 중소 도시에 전파할 수 있을지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말했다.

허시버그는 지난달 지방선거를 마무리한 한국 지방자치단체장들에게도 메이커 시티 개념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한국은 미국 메이커 시티와 같은 자발적 도시재생 혁신 문화가 일천하고 시민 또는 기업가들 참여를 통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밑에서부터 혁신' 또한 익숙하지 않다"며 "그렇다면 '메이커'와 같은 혁신 인재들이 어떻게 도시에 넘쳐 나게 할 수 있을지가 새 지자체장들에게 도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허시버그는 같은 동양 문화권인 싱가포르 사례가 한국에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5년쯤 전에 오픈 데이터 프로젝트를 싱가포르와 함께했을 때 일"이라며 "당시 싱가포르 경제담당 관료들은 '과연 각종 도시 데이터를 공개한다고 해서 시민들이 이를 활용한 앱을 자발적으로 개발할 것인지'를 무척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오픈 데이터 프로젝트에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도시가 갖고 있는 공공데이터를 개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대기업인 싱가포르텔레콤이 갖고 있는 데이터를 먼저 공개하기로 했다. 대기업을 레버리지 삼아서 혁신적 기업가들이 올라탈 수 있는 디딤돌을 만들었다. 싱가포르텔레콤은 개인들이 현재 모바일로 접속한 위치정보를 공개했는데 그 결과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됐다. 허시버그는 "택시를 타려는 사람 중 50%는 같은 장소를 향해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즉 이들이 '합승'할 수만 있다면 훨씬 지속 가능하고 친환경적 도시 교통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당시에는 우버가 싱가포르에 앱을 출시하기 전이었지만 차량 공유경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것"이라며 "이후 몇몇 현지 스타트업이 관련 비즈니스에 본격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싱가포르 차량 공유 스타트업 '그랩'은 2014년 싱가포르로 본사를 옮긴 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작은 규모의 혁신적 집단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도시는 변화하기 시작한다"며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 싱가포르는 대기업을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허시버그는 "혁신적 기업가들이 탄생한다면 그들에게 집중해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일단 지원을 한 다음에는 그들이 알아서 크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며 "싱가포르 정부는 시민들을 통해 얻은 배움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도시를 보다 혁신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대기업이나 기성 기업의 노력은 결국 그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돼 돌아온다. 이른바 상생(相生)이다. 허시버그는 이스라엘 정보기술(IT) 플랫폼 기업인 웨이즈(Waze)가 지난해 미국 전역을 덮친 태풍 하비와 어마 사태 때 정부를 도와준 다음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를 소개했다. '웨이즈'는 '구글 트래픽'과 유사하게 사용자들이 스스로 자기 위치를 공유하는 플랫폼으로, 이 앱을 보면 현재 어떤 지역에 교통 체증이 심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미국 남부 지역에 강력한 태풍이 불어닥치면서 이 일대에 대한 에너지 공급 문제가 정부 차원에서 심각한 이슈로 떠올랐다. 정부는 석유를 실은 긴급구호 트럭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는데 어디로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주유소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도움이 된 것이 '웨이즈'였다. 특정 주유소 인근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곳이 웨이즈였기 때문에 이 회사는 백악관에서 도움 요청을 받자마자 하루 만에 문제를 해결해 줬다. 그는 "이후 '웨이즈'는 수많은 도시 정부에서 도움을 요청받았고 다른 도시 데이터도 받아가면서 더 많은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대기업도 상향식 도시 모델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스스로 시장 지위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하향식(톱다운) 도시 개발 방식에 익숙한 한국에서도 충분히 상향식(보텀업) 도시 개발이 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는 "동양 아이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톱다운식 도시 개발에만 집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상향식 도시 모델 '메이커 시티'가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현재의 시대적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기술 진보로 인해 미래는 보다 알 수 없게 변화하고 있지만 "그런 미래에 시민들이 대비할 수 있는 적응력을 기르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메이커 시티'를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의 논점이다. 인공지능(AI)이나 로봇이 농·어업(1차산업), 제조업(2차산업), 서비스업(3차산업)에서 모두 인간의 노동 영역을 대체해 나가고 있는 지금, 인간 역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한다는 점은 당위가 됐다. 그렇다면 인간이 진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도시를 만들자는 주장이 '메이커 시티'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허시버그는 "과거처럼 학교에 가면 공부를 하고, 졸업하면 직장에서 일하는 패턴은 통하지 않게 됐다"며 "지금은 놀면서 배우고 동시에 일하는 노동 방식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메이커 시티'에서 어린이들은 놀면서 그들이 원하는 제조물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있다"며 "미래 도시는 이렇게 전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메이커 시티'란…도시 설계·디자인 등 오픈소스 형태로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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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커 시티'는 한마디로 '메이커'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가는 도시 모델을 뜻한다. '메이커'는 미국 IT 출판사 오라일리 미디어 사장인 데일 도허티가 2004년부터 주창한 개념이다.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제조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메이커(Maker)'들은 각종 설계도면이나 디자인을 오픈 소스 형태로 공유하면서 함께 협력해서 새로운 제조물 시제품(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나가는 행태를 갖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메이커' 운동을 지지했고 2015년에는 백악관이 '메이커'들을 위한 행사 '메이커 페어'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런데 '메이커' 운동이 시작된 지 약 10년이 지난 2015년부터 이런 '메이커'들이 주도하는 도시를 만들자는 '메이커 시티' 프로젝트가 미국 전역에서 추진됐다. 제조물을 넘어서 도시의 작은 구역 전체를 다수 '메이커'들이 오픈 소스 형태로 만들어 나가는 공동 작업이다. 매일경제는 올해 3월 국민보고대회를 통해 다양한 스타트업 창업자, 기업가,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가상공간에서 도시를 만들어 가는 오픈 소스형 도시 개발 모델 '이데아 시티'를 제안한 바 있는데 '메이커 시티' 역시 그와 비슷한 모델이다.

He is…

△다트머스대 공공학과 학부,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 △1984~1993년 애플컴퓨터 기업마케팅부서 △1995년 엘리멘틀소프트웨어 창업 △1999년 인터패킷네트웍스 창업 △2001년 Gloss.com 창업 △2005년 테크노라티 회장 △2011~2012년 유엔 글로벌 Pulse 프로그램 전략자문 △2014~2015년 시티이노베이션재단(샌프란시스코) 자문역 △2008년~현재 리이매진(Re:Imagine) 그룹 CEO △2015년~현재 '메이커 시티' 프로젝트 공동 창업자

[신현규 기자 / 사진 =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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