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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쉿! 우리동네] 코발트블루의 바다향…'한국의 피카소' 전혁림의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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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전혁림 생가 자리에 미술관 건립…청와대엔 `통영항' 걸려 있어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에 좌파 예술인으로 몰려 차별받기도

(통영=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색채의 마술사, 다도해의 물빛 화가, 색면추상의 대가, 한국적 추상화의 비조, 한국의 피카소.

연합뉴스

전혁림 화백의 통영항



평생을 통영에서 살며 통영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린 전혁림(1916~2010) 화백을 일컫는 수식어다.

그의 작품이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3년 전이다.

2005년 11월 경기 용인의 이영 미술관에서 전 화백 신작전이 열리고 있었다.

아침 방송을 통해 우연히 관련 보도를 본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방문을 결정한 뒤 버스를 타고 미술관을 방문했다.

전시회를 관람한 노 전 대통령은 '한려수도'라는 작품을 구매하길 원했으나 사이즈가 너무 커 청와대에 걸 곳이 없었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같은 그림을 다시 그려줄 것을 청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미륵산과 남해안 풍경을 담은 가로 7m, 세로 2.8m의 1천호짜리 유화 '통영항'이다.

제작 기간 4개월을 거쳐 완성된 이 작품은 2006년 3월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 걸렸으나 이명박 정부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옮겨지며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지난해 중순께 다시 청와대로 귀환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와 관련해 전 화백은 살아생전 주변에 '억울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에게 그림을 팔았다는 이유로 '좌파 예술가'로 낙인찍힌 바람에 보수성향 지방자치단체장들로부터 각종 지원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알게 모르게 차별받았기 때문이다.

굳이 정치성향을 따지자면 전형적인 '경상도 보수'에 가까웠던 전 화백은 "대통령이 그림을 팔라는데 안 팔 화가가 어디 있겠느냐"고 푸념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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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인왕실에 걸린 통영항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 전 화백을 잘 알았다고 한다.

부산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던 노 전 대통령의 동료 중 전 화백으로부터 그림을 배운 제자도 있어 전 화백은 그 일대에서 나름 명성이 높았다.

간접적으로 전 화백의 이야기를 전해 듣던 노 전 대통령이 방송에서 그의 소식을 듣자 '아직 살아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네'라는 반가운 마음에 전시회로 달려가 만났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전 화백은 노 전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었다.

이렇듯 전 화백은 통영을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평생 통영에 살며 아름다운 자연과 시리도록 푸른 색채를 화폭에 담아냈다.

전 화백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경남 통영 무전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세계적인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되고자 틈만 나면 통영 바닷가에 펼쳐진 모래사장에서 뛰어놀았다.

노란 모래사장, 푸르게 깔린 바다, 파란 하늘을 차고 뛰어드는 기쁨은 그를 환상처럼 붙잡았다.

시인 정지용은 1950년 통영기행문에서 "금수강산 중에도 모란꽃 한 송이인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가 작품에서 코발트블루를 즐겨 쓰고, 색에 민감하며, 자연이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같은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과 유관하다.

또 당시 통영은 타지역보다 일찍 개화된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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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작업에 몰두 중인 전혁림 화백



일찍이 통영은 조선 시대 삼도수군통제의 본영으로 세병관을 중심으로 한 열두 공방이 있어 문물이 앞선 지역이었다. 피 묻은 병장기를 닦아낸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세병관(洗兵館)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육지인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지어진 객사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소지주의 자식들이 일본유학을 다녀와 자못 문화적 분위기를 일구고 기후도 온화해 많은 일본인이 이주해 살고 있던 것도 그런 분위기를 거들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그는 성장기를 거치며 점차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번역이 필요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나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은 그를 자연스레 미술로 이끌었다.

특히 일본 미술잡지를 통해 접한 피카소, 샤갈, 마티스의 그림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33년 통영수산학교를 졸업하고 미술을 배우려 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미술학교 유학을 포기하고 진남 금융조합에 다니며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유일한 스승은 바로 통영의 푸른 바다와 섬이었다.

애초 프랑스로 유학을 가 그림을 체계적으로 배워보려 했으나 1945년 해방이 오자 민족정신을 문화예술로 고취하고자 조국에 남아 활동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그와 통영에서 함께 활동한 예술가 동지가 작곡가 윤이상, 시인 유치환·김춘수·김상옥 등이었다.

지방이라는 한계에도 그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후대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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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통영항 모습



전 화백은 회화를 통해 통영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삶의 역동성과 고난도 함께 보여주고자 했다.

동시에 고도의 문화는 추상의 차원에서 이뤄진다고 믿고 평생 추상화를 그렸다.

그런 그에게 하늘을 이고 있는 듯 잔잔히 빛나는 통영의 쪽빛 바다와 다도해 물결은 끊임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창작의 근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작품은 전통 오방색채와 조형성을 바탕으로 한국성을 나타내는 추상화와 통영을 중심으로 한 바다 풍경으로 크게 나뉜다.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통영항'도 통영 바다의 강렬한 색채를 화폭에 푸른 빛으로 담아 미래지향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특히 '통영항' 등 통영 풍광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작품에 영감을 준 통영항은 한려수도의 비경을 간직해 '한국의 나폴리'로 불릴 정도다.

1963년 9월 개항한 이곳은 주로 수산물의 수출입을 담당하고 있는 국제무역항이다.

또 이곳의 수산물 생산량은 전국 생산량의 10%에 해당하는 연간 27만t이 집산되는 우리나라 연근해 어업의 전진 기지항이자 남해안에 산재한 크고 작은 섬들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통영 여객선터미널과 마주 보는 서호시장은 각종 해산물과 활어로 유명하며 통영 대표 먹기리인 꿀빵을 파는 가게가 곳곳에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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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전혁림 미술관



화물선부두에 정박한 배들을 따라가면 호리병처럼 옴팍하게 만곡진 항인 강구안이 나오는데 이곳의 뒷쪽 언덕은 유명한 벽화마을 동피랑이다.

이밖에 거북선 있는 문화마당과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활기가 넘치는 중앙전통시장도 빼놓을 수 없다.

천혜의 자연환경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감수성을 키워온 덕분에 전 화백은 화가로서 천부적인 재능은 탁월했지만, 환갑이 넘도록 명성을 얻지 못하고 그저 그런 지방 화가 취급을 받았다.

평생을 통영에 머물며 서울 중심의 중앙화단과 교류가 없었던 탓이다.

젊은 시절엔 애써 그렸던 캔버스의 그림을 지우고 다시 사용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런 그가 한국 화단의 중심에 선 시기는 나이 60대 중반이 넘어서였다. '계간 미술'이란 미술 전문 계간지가 백남준, 오지호와 함께 알려지지 않은 작가로 전 화백을 재조명한 것이다.

이제는 명실공히 한국 추상회화의 개척자로 인정받아 고향에 그를 기념하는 '전혁림미술관'도 세워졌다.

미륵도 용화사 가는 길목에 있는 이 미술관은 전 화백이 1975년부터 30년 가까이 생활한 집을 헐고 2003년 신축한 곳이다.

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전 화백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통영 바다를 상징하는 등대와 사찰의 탑을 접목했으며 세라믹 타일 7천500장에 그의 작품을 담아 외벽을 장식해 화사하고 미려하다.

특히 3층 외벽은 1998년 작품인 '창'으로 가로 10m, 세로 3m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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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봉평동 '전혁림 거리'



미술관 전시실에는 전혁림 화백의 작품 80여점과 미술 도구, 생애를 엿보게 하는 사진과 시화 등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미술관 관장은 그의 아들인 전영근 화백이 맡고 있다.

미술관을 중심으로 그가 생전에 거주하며 활동한 봉평동 거리 일대는 '전혁림 거리'로 선포됐다.

전혁림 거리 한쪽에 자리한 당산나무 아래에는 높이 2m, 폭 50㎝ 규모의 화비도 설치돼 있다.

안타깝게도 변함없이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자연환경과 기념 미술관, 봉평동 전혁림 거리 외에 전 화백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통영에 거의 남지 않다.

전혁림미술관도 아들 전영근 화백이 사비를 털어 아버지 사후 완공한 곳이다.

통영은 유명 관광지인 동시에 문화예술의 도시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시 관계자는 "전 화백 관련 사업으로 매년 국내 서양화 작가를 대상으로 한 '전혁림 미술상'을 4회째 개최 중"이라며 "이밖에 다른 지원 사업계획은 당장 없으며 중·장기적으로 검토해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home12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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