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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한국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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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제주에서 일자리 찾아나선 예멘 난민 알하라지…

“고향으로 돌아가면 전쟁에 내몰려 죽을 텐데”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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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 포크 레스토랑.”

식당 주인이 서툰 영어로 “우리는 돼지고기를 파는 식당”이라고 하자 예멘에서 온 알하라지의 눈이 번뜩이다가 빠르게 흔들렸다. 식당은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다. 중문관광단지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피서철이면 손님이 줄지어 찾는 곳이다.

돼지고기 식당에 취업한 무슬림

6월18일 오전, 공항 가까운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이하 출입국청)에는 예멘인 230여 명이 일자리를 구하려고 모여들었다. 알하라지도 그중 한 명이다.

“뭐든 할 수 있다”던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돼지고기는 알하라지에게 ‘허용되지 않은’ 음식이었다. 옆에 있는 고종사촌 동생 후세인에게 모국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후세인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둘은 주인 부부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눴다. 후세인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알하라지는 동생의 팔을 꼭 잡고 단호한 어조로 타일렀다.

알하라지가 식당 주인에게 “우리는 이슬람교도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먹지만 않으면 된다. 그릇을 씻거나 주방일을 거드는 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식당 주인의 아내는 이마에 고랑이 파이면서 “우리 집에서 돼지고기 안 먹으면 먹을 게 없는데 어떻게 하지”라며 난처해했다. 알하라지와 후세인은 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식당 주인의 아내는 내키지 않았다. 마뜩잖은 표정으로 남편에게 물었다. “이 친구들 하루에 몇 번씩 절해야 한다고 하던데 영업시간이랑 겹치면 어떻게 해요?”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 기도 시간이 되면 동시다발적으로 예멘인들의 휴대전화에 알람이 울렸다.

식당 주인은 기자에게 “우리는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재료 준비하고 식당 청소한 뒤에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는데 혹시 그 시간이 기도 시간과 겹치는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기자가 난민 취업 알선 브로커가 되는 순간이었다. 알하라지는 휴대전화를 꺼내 기도 시간을 보여줬다. 저녁 7시45분과 9시43분. 두 번의 기도가 영업시간과 겹쳤다. 아내가 “어휴, 그 시간에 손님이 몰려서 가장 바쁜데 어떻게 해. 안 돼!”라며 손을 가로저었다. 알하라지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괜찮다. 일이 있으면 일 없는 시간에 몰아서 기도를 올려도 된다. 우리를 데려가라.”

영어를 하지 못하는 후세인은 알하라지의 팔목을 잡아끌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물었다. 설명을 들은 그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목소리가 커졌다. 둘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알하라지는 기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 동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꼭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겠다는 거였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십수 명의 예멘 난민은 식당 주인과 알하라지 형제를 에워쌌다. 자신들을 식당에 데려가주길 바랐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멀뚱멀뚱 식당 주인 부부를 쳐다볼 뿐이었다. 알하라지는 절박했다. 식당 주인이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다른 친구를 데려가겠다고 할지 몰랐다. 타이름은 다그침으로 바뀌었다. 알하라지는 “지금 주인 부부를 따라가지 않으면 당장 잘 곳도, 먹을 것도 없다”고 했다. 후세인은 형의 꾸짖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티격태격하는 형제를 보던 사장이 “기도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 “5분이면 된다.” 알하라지가 답했다. 사장은 결심한 듯 “그럼 괜찮다. 우리랑 같이 가자”고 했다. 안주인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다. “설마 손님들 보는 데서 기도하는 건 아니겠지?” 아내의 걱정 섞인 질문에 지그시 눈을 내리감은 남편은 “식당 옆 작은 방이 있으니 거기 잠깐 들어가서 기도하면 된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아내는 남편에게 더 따져묻기를 포기하고 기자에게 물었다. “숙소에 다른 예멘 친구들을 데려올 건지 물어봐달라.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달라.” 알하라지는 친구를 데려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주인 부부는 알하라지와 후세인을 데리고 출입국청사를 나섰다.

군대 끌려가 주검이 된 남자들

남겨진 예멘인들은 떠나는 알하라지와 후세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곧 다른 고용주를 찾아 흩어졌다. 고용주들은 영어를 할 수 있고, 근육이 있어서 힘을 꽤 쓸 것 같은 예멘인들을 선호했다. 예멘인들은 고용주인지 공무원인지 기자인지도 모르고 한국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파도처럼 모여들었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알하라지의 고향은 예멘 수도 사나에 있는 누쿰산 기슭이다. 누쿰산은 후티 반군이 주둔하면서 수시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연합군의 폭격 대상이 됐다. 그는 자신의 집 바로 앞에 폭탄이 떨어졌던 2015년 5월11일 오후를 잊지 못한다.

전투기가 굉음을 내고 머리 위를 날아갔다. 눈앞에 뜨거운 불빛이 번쩍였다. 잠시 뒤,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이 온 도시를 뒤흔들었다. 먼지가 가득 피어올라 시야가 흐려진 가운데 무수한 화염이 뿜어져나왔다. 반군이 허공에 총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총알은 전투기를 맞히지 못했다. 알하라지는 건물 지하로 뛰어내려갔다.

총성이 잦아든 뒤 거리로 나왔을 때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가득했다. 이웃집에 살던 레미 아저씨는 자신의 왼쪽 다리와 왼손을 잡고 있던 어린 아들을 잃었다. 경찰이나 소방관은 달려오지 않았다. 주민들은 직접 다친 이들을 차에 태워 병원으로 갔다. 마을에는 주검과 부상자가 넘쳐났다. 연합군이 수시로 떨어뜨리는 폭탄은 반군 기지뿐만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까지 초토화했다.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한 알하라지는 부모님, 세 동생과 함께 살았다. “괜찮아질 거야. 내일은 괜찮을 거야.” 가족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기도했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후티 반군은 예멘 청년들을 강제로 끌고 가 총을 주고 전쟁으로 내몰았다. 집총을 거부하면 연합군으로 간주해 죽이거나 감옥에 가뒀다. 전쟁에 끌려간 알하라지의 친구들은 모두 죽었다. 사나 시민들은 내전에서 죽은 청년들의 초상을 크게 인화해 건물 벽에 내걸었다. 영정 사진은 자꾸 늘어만 갔다.

알하라지도 후티 반군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나는 그저 평범한 학생일 뿐이다. 연합군이 아니다. 돌봐야 할 가족이 있으니 제발 집으로 보내달라.”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알하라지를 풀어주라고 호소했다. 반군은 마지못해 그를 풀어줬다. 공부하며 돈을 벌기 위해 다녔던 은행이 문을 닫았다. 알하라지의 부모는 “이곳엔 미래가 없다. 떠나서 새로운 삶을 살라”고 했다.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곳,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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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하라지 같은 예멘인들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선택지가 말레이시아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예멘 사람을 난민으로 인정해주지는 않았지만 내치지도 않았다. 예멘인 수만 명이 전쟁을 피해 말레이시아행을 택했다. 알하라지가 예멘을 떠나는 비행기를 구하는 데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사나 공항은 거의 폐쇄된 것과 다름없었다. 지난 1월 알하라지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아덴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그는 아덴을 통해 수단으로 갈 수 있었다. 수단에서 이틀을 머문 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삶은 비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적대감 가득한 욕설을 들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8년을 기준으로 이전에 입국한 예멘인에게는 최대 2년까지 인도적 체류를 허락했지만, 이후 입국한 예멘인은 3개월 이상 체류할 수 없게 방침을 바꿨다.

말레이시아에서 예멘인이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제주도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체류 가능 기간을 15일 남겨두고 그는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난 사촌동생 후세인과 함께 제주행 비행기에 탔다. 예멘에서 가져온 짐 대부분은 버려야 했다. 수하물을 부칠 돈이 없었다. 알하라지가 탄 비행기에는 그와 같은 처지의 예멘인 31명이 더 있었다. 4월30일 제주공항에 도착한 알하라지에겐 100달러가 가진 돈의 전부였다. 말레이시아에서 ‘물담배’를 만들어 번 돈이다. 하지만 관광지인 제주도의 물가는 감당하기에 벅찼다. 일주일 만에 빈털터리가 됐다.

5월4일 난민신청서를 제출한 알하라지는 11월4일까지 6개월의 시간을 벌고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프랑스어·독일어·아랍어·영어 4개국어를 할 수 있지만 한글을 못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먹고, 자고, 이따금 유튜브로 한국어 강의 동영상을 봤다. 정부는 아무 지원을 하지 않았지만 시민단체와 제주도 주민들이 십시일반 도움을 줬다. 숙소비를 내주고, 음식을 만들어서 찾아오는 도움의 손길 덕에 길에 나앉지 않을 수 있었다. 알하라지는 “(묵고 있는) 숙소 주인은 우리가 돈이 부족한데도 개의치 않고 받아줬고 쫓아내지 않았다. 우리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데, 제주 주민들이 음식 재료도 갖다줬다. 누구 하나 우리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우리를 받아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알하라지는 내심 불안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낯선 나라 화폐 7천원이 전 재산이었다. 제주 출입국청이 예멘인을 위해 여는 이날 일자리 소개 행사에서 꼭 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별렀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한국의 난민 인정률이 너무 낮다는 사실은 그에게 불안 요인이다. 한국이 그를 난민으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다시 이 나라 저 나라를 위태롭게 떠돌거나 예멘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예멘으로 돌아가면 전쟁에 내몰려 죽을 텐데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최근에는 내전 상황이 악화돼 예멘 국경이 폐쇄됐다. 돌아갈 방법도 없다.” 눈시울이 붉어진 알하라지가 체념하듯 말했다.

제주=이재호 기자 ph@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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