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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정적까지 대통령 만든 `자의반 타의반` 킹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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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필 전 총리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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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세상을 떠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정치적 격변기 때마다 전면에서 혹은 배후에서 한국 현대사 물줄기를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쿠데타 주역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도왔고, 1990년대에는 3당 합당, DJP 연합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을 이뤄냈다. 한때 정적이었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기여한 김 전 총리에게는 언젠가부터 '킹 메이커'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한국 현대정치사를 풍미한 '3김' 가운데 유일하게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고, 박정희 정권 당시에도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영원한 2인자'라는 달갑지 않은 별칭도 따라다녔지만 김 전 총리는 정치사의 거인임에 틀림없다.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서울대 사범대학 2학년 시절 부친의 사망과 함께 가세가 기울자 육군사관학교(8기)에 입학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김 전 총리는 이후 육군본부로 배속되고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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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김 전 총리 부인인 박영옥 여사는 박 전 대통령 큰형의 딸이다. 박 여사를 김 전 총리에게 소개한 박 전 대통령은 조카사위인 김 전 총리를 '임자'라고 불렀고, 이때 맺어진 인연은 5·16 군사정변을 계기로 최고통치권자와 정국 운영의 2인자라는 동지 이상의 운명으로 자리매김했다.

35세인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며 전면에 등장한 김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1961년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고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이끄는 등 첫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정치자금 확보 과정에서 불거진 '4대 의혹 사건'에 연루돼 1963년 김 전 총리는 한때 외유에 나섰으나 같은 해 치러진 제6대 총선에서 당선되며 정치 무대에 데뷔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한일 외교 파동'으로 인해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971년 국무총리에 오르는 등 박정희 정권에서 확고한 2인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김 전 총리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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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부 당시에도 국정의 '2인자'로 머물긴 했으나 '5·16 군사정변을 기획·실행한 주체는 김 전 총리'라는 세간의 평가가 있을 정도로 김 전 총리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다만 박정희 정권 당시 설립된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을 맡아 정권에 대한 비판 활동을 감시·통제하고, 정보기관에 수사권까지 부여하는 등 오늘날 비판받는 '정보 정치'의 길을 열었다는 점은 김 전 총리의 '그늘'로 남아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부가 유신헌법을 통해 종신 집권을 추진할 때 국무총리로서 협조했다는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 '김종필-오히라 메모' 당사자인 김 전 총리는 한일협정 추진 과정에서 일본에 한국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신군부 출범 후 잠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김 전 총리는 6·29 민주화 선언이 발표된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정계에 복귀한다. 김 전 총리의 정치적 영향력은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김 전 총리가 주축이 된 '3당 합당'에서 절정에 달한다. 3당 합당을 통해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고, 김 전 총리는 현재 대한민국 보수 정당의 뿌리가 되는 민주자유당 창당에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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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민주자유당과 결별한 김 전 총리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고 1995년 제1회 지방선거,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선전한다. 당시 확보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김 전 총리는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DJP 연합'을 통해 호남·진보세력의 첫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고, 김 전 총리 자신은 생애 두 번째 국무총리에 오른다. 그러나 DJP 연합 당시 조건으로 제시한 내각제 이행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DJP 연합은 2001년 해체된다. 여기에 자민련이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충청 정당'에 머무르는 위기에 놓이면서 김 전 총리의 정치적 영향력도 조금씩 축소돼 갔다는 평가다.

김 전 총리의 정치적 영향력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정국과 함께 완전히 소멸된다. 당시 자민련은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과 함께 탄핵에 찬성했다가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역풍을 맞았고, 자민련 역시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김 전 총리조차 당선시키지 못할 정도로 참패했다. 이후 김 전 총리는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나름대로 재가 됐다"며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후배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하는 원로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지난 23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록 김 전 총리 자신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지만 1997년 제15대 대선 당시 DJP 연합이 없었다면 '평화적 정권교체'는 더욱 늦어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석환 기자 / 이윤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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