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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진압 10년 만에 쌍용차 복면인들 “이제야 말한다, 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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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특집

2009년 8월5일 ‘그날의 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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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5일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이 조립공장 옥상에서 경찰 특공대의 방패와 곤봉에 무너지던 장면은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의 비극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한국 사회에 각인됐다. 그날 작전을 조사해온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원회가 결과 발표(7월중)를 앞두고 있다. 작전 뒤 경기지방경찰청은 ‘폭력 진압’ 비판에 맞서 정당성을 주장하며 <쌍용자동차 사태 백서>를 발간했다. 특공대가 동원된 작전이 어떻게 추진·실행·관리했는지가 ‘경찰 입장’에서 정리돼 있다. 그날 진압·체포당한 ‘복면인들’이 햇수로 10년 만에 처음 얼굴을 드러내며 ‘그 옥상’을 이야기했다. 그들의 증언과 백서에서 확인된 사실들을 토대로 ‘그날의 옥상’과 ‘옥상 이후 오늘’을 전한다.



쌍용차 정리해고 비극 상징하며
한국 사회에 각인된 ‘그 장면’
2009년 8월5일 조립공장 옥상
8분 만에 끝난 특공대 진압작전
옥상서 검거된 11명 중 7명 모여


경찰 방패와 진압봉에 무너졌으나
익명의 복면인으로 살아온 그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조사 발표 앞
햇수로 10년 만에 처음 얼굴 공개
영상·사진 보며 확인한 그날 그때


9년 전 전파를 탄 방송 뉴스가 지난 19일 저녁 경기도 평택의 한 사무실에서 재생됐다.

“미처 도망치지 못하거나 도망치다 붙잡힌 노조원들에겐 어김없이 방패와 곤봉세례가….”(2009년 8월5일 뉴스9 ‘투석·물대포·화염…전쟁터’)

“쏟아진다”로 이어지는 기자 리포팅을 ‘일시 멈춤’ 했을 때 김주중(48)이 정지된 화면의 한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있네.”

몸을 동그랗게 만 남자가 경찰 방패를 몸으로 받고 있었다. 남자가 방패 삼아 들고 있던 솥뚜껑 위로 경찰의 시위 진압 방패가 내리 찍혔다. 빔프로젝터가 쏘는 뉴스 영상과 영상을 띄운 하얀 스크린 사이에 김주중이 섰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경찰 방패와 진압봉에 무너지는 남자의 모습 위로 김주중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가 남자의 ‘정체’를 밝혔다.

“이 사람, 나다.”

공장 지붕에서 벌레같이 찌그러지는 작은 형체들 중에서 그는 스스로를 구별해냈다. 김주중의 양옆으로 조문경(54)과 최노훈(48)이 섰다. 그들도 영상과 사진 안에서 찍히고 밟히는 자신들을 찾아냈다. 세 얼굴 위에 드리운 지붕의 주름이 지난 시간 그들을 가둬온 창살처럼 보였다. 그들 앞에서 여전히 얼굴 공개가 두려운 네 명의 해고자가 그들을 바라봤다. 그날, 그때, 그곳 조립공장 지붕에서 부서진 그들의 삶은 두 번 다시 ‘옥상 이전’으로 조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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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에 새긴 ‘그날의 8분’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들이 물포를 쏘며 쌍용자동차 조립공장 지붕으로 하강했다.

7개월 전 서울 용산 재개발 상가 옥상에서 전개된 ‘낯익은 작전’이 평택의 옥상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2009년 8월5일 8시7분. 경찰 특공대 30여명을 태운 컨테이너 3대를 대형 크레인이 조립공장 옥상으로 매달아 올렸다. 컨테이너는 진압 21일 전인 7월15일부터 제작·준비됐다. 경기지방경찰청은 20명이 탈 수 있는 컨테이너(600×300×250㎝)를 1500만원을 들여 7일 동안 만들었다. 2대는 서울 경찰특공대에서 지원받았다. 컨테이너를 뛰쳐나온 특공대원들의 조립공장 진압이 시작됐다. 완료하는 데 8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0시25분 헬리콥터에서 줄을 타고 내려온 특공대는 도장 1공장 옥상을 장악했다. 15분 뒤엔 렉스턴 차체공장까지 접수했다. 이틀 동안의 진압작전으로 파업 조합원들은 거점을 잃고 도장 2공장에 고립됐다.

“저걸 또 왜 틀고 그래.”

유리문(경기 평택 칠괴동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을 열고 들어서며 최성국(47)이 말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그는 “머리가 다시 뜨거워진다”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고개를 숙이고 ‘그 영상’을 외면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8분’이 새겨진 몸과 마음은 지금도 곪고 있었다.

조립공장 옥상은 ‘쌍용차 77일 파업’(2009년 5월22일~8월6일)의 마지막 전쟁터였다. 초식동물처럼 쫓기는 조합원들이 맹수처럼 쫓아오는 특공대에 붙잡혀 곤봉과 방패에 난타당하는 장면은 모두 29명의 사망자를 낸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의 비극을 상징했다.

햇수로 10년이 걸렸다. ‘익명의 복면인들’이 10년 만에 수건 뒤의 얼굴을 드러내며 처음으로 한 자리(경찰에 체포된 11명 중 7명)에 모였다. 그들이 얼굴을 감싼 수건을 벗고 카메라 앞에 서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진압의 피해자이기보다 ‘극렬 범법자’로 묘사된 그들은 기억의 구덩이에 그날을 파묻고 다시 떠오르지 않길 바라며 살아왔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 발족(2017년 8월25일)한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원회가 그날의 일들을 조사하면서 용기를 냈다. 그 사이 진압을 이끈 지휘관(조현오)은 ‘여론조작 혐의’로 고발됐고, 진압을 허락한 대통령(이명박)은 18개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 스스로 막았던 입을 열며 복면인들이 말했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살고 싶었을 뿐이다.”

작전 4개월 뒤 경기경찰청은 <쌍용자동차 사태 백서>를 펴냈다. 조현오 청장은 “경찰 역량의 눈부신 개가”라고 그날의 진압을 자평(발간사)했다. 진압의 추진·실행·관리 과정을 ‘경찰 입장’에서 서술하며 “모든 사실 왜곡과 거짓 선동에 진실로써 당당히 맞서”겠다고 했다. “(진압) 직후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격려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59쪽)는 사실도 공개했다. 발간 다음 달 그는 파업 진압의 공을 인정받아 서울경찰청장(제24대)으로 발탁됐다. 다시 7개월 뒤 경찰청장(제16대)으로 고속 승진했다.

김주중은 그날 옥상 모서리 쪽에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경찰들을 막느라 공중에서 내려오는 컨테이너를 보지 못했다. 발견했을 땐 특공대가 “코앞”에 와 있었다.

“전투화에 뻥 차인 뒤 넘어졌다. 순식간에 맞고 쓰러져서 저항할 틈이 없었다. 군홧발로 수없이 차이고 진압봉으로 끝없이 맞았다. 사쪽 직원들이 쏘는 볼트를 막으려고 구내식당에서 가져온 밥솥 뚜껑을 방패처럼 들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밥솥으로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시뻘겋고 시퍼런 멍이 온몸을 덮었다.”

김주중의 뒤에선 송진규(가명·49)가 두들겨 맞았다. 최루액과 물포를 대비해 비닐 우의를 입고 있던 그는 특공대를 피해 달려가다 지붕 턱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쫓아온 경찰의 방패와 곤봉과 발길질이 그의 몸 위로 달려들었다.

“곤봉에 머리를 맞고 도망치다가 도랑처럼 패인 곳에 빠져서 중심을 잃었다. 그 뒤로 통증이 밀려왔다.”

박원경(가명·인터뷰엔 참여하지 않음)은 송진규로부터 20여m 왼쪽에서 엎드린 자세로 방패를 맞았다. 머리 위로 쳐들어진 방패가 수직으로 그의 몸으로 되풀이해 내리꽂혔다.

경기경찰청이 만든 ‘쌍용차 백서’
경찰이 정리한 진압작전의 경과
사이버대응팀 구성해 ‘댓글 작전’
사쪽과 도면 연구하며 관계 돈독
쌍차에서 첫 시도된 진압기술들


정신병원, 악몽, 응급실, 가족해체
자살 시도, 신용불량, 취업 거부
과거 아닌 현재도 계속 곪는 상흔
“진상 밝혀지면 망가진 삶 돌아오나”
아직 종료되지 않은 ‘그날의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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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파업 때도 ‘댓글 작전’


2009년 5월22일 쌍용차 노조가 공장 점거파업(4월8일 사쪽 2646명 구조조정 발표)을 시작했다.

경찰은 파업 당일 송탄시 주민자치센터에 지휘용 전화기 2대와 팩스 1대를 개통(326쪽)했다. 파업 7일째인 5월28일 지부장 한상균(2015년 1월~2017년 12월 민주노총 위원장·민중총궐기 주도로 구속된 뒤 지난 5월21일 가석방) 등 9명의 체포영장을 발부받고 체포전담반을 편성(수사관 28명→46명 확대)했다.

“그 기저에 강성노조가 버티고 있다는 점”(70쪽)이 경찰이 바라보는 “쌍용차 사태의 핵심”이었다. 경기경찰청은 이미 6월말부터 공장 진입 대책을 수립(180쪽)해 나갔다. 쌍용차 사쪽엔 경찰 중대별로 “안내요원 선정을 요구”(175쪽)했다. 담당 정보관들이 “공장 내부 사정에 정통한 직원들과 매일 접촉하면서 내부 도면을 연구”했다. “공권력 투입으로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는 소문이 사측 직원들 사이에 퍼지면서 잔뜩 고무되어 경찰과의 돈독한 신뢰관계가 형성”(170쪽)됐다. 경찰과 경비용역과 사쪽 직원이 한데 뭉쳐져 파업 노동자들과 대치했다.

7월1일 경찰은 “노사분규 현장에 전국 최초로” 특별수사본부(90명)를 발족(227쪽)했다.

7월2일 경기경찰청 소속 50여명으로 구성된 ‘쌍용차 사이버대응팀’이 설치(342쪽)됐다. “2008년 쇠고기 파동 이후 사이버상의 대응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됐다(342쪽)는 판단에서였다. “사이버대응팀은 평시 본인의 기본업무를 수행하면서 틈틈이 좌파단체 등에서 인터넷상에 게재하는 기사·동영상·포스트 글 등을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허위 사실에 대해서는 댓글을 게재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작전 두 달 전부터 경찰은 “노조의 폭력성”을 부각하고 진압의 정당성을 쌓는 여론 작업을 벌였다. 9년 뒤 조현오는 검찰에 고발(3월15일 참여연대)됐다. 경찰청장 재임 당시 경찰청 보안국 중심으로 정부 비판 여론에 개입·조작하고 글 게시자를 종북으로 몬 혐의였다. 경찰은 국정원·기무사령부와 더불어 이명박 정부 댓글공작의 한 축이었다. 그에겐 쌍용차 진압 때부터 시작된 ‘댓글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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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1일 조현오 등 지휘부가 쌍용차 현장(‘4WD 주차장’ 앞 지휘버스)에 상주했다. 경찰이 사내에 전진 배치된 이날 한 조합원의 아내가 목숨을 끊었다. 경찰은 “망자가 평소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174쪽)고 언론에 설명했고, 노조는 ‘고인의 죽음이 쌍용차 사태와 무관한 것처럼 왜곡하지 말라’며 반발했다. 경찰은 “지속적인 FTX(field training exercise·야외기동훈련)로 압박수위를 고조”(192쪽)했다.

7월31일 경찰이 지휘본부를 쌍용차 본관 5층으로 옮겼다.

8월2일 노사협상이 결렬되자 경찰은 헬기 저공비행과 최루액 살포, 선무방송, 경력 전진배치로 압박했다. “이탈자 현황 및 공장내부 분위기, 경찰력 증강배치 등 경찰대비 상황, 검거 및 수사상황 등을 매일 언론에 적극적으로 제공하여 이탈자 가속화를 유도”(290쪽)했다. “농성 와해”(290쪽)가 목표였다.

8월3일 강성영(가명·49)도 공장을 이탈했다. 강원도 태백에서 37년 간 광부로 일한 그의 아버지는 경찰 진압이 임박하자 매일 공장 정문 앞에서 아들에게 전화(“나올 때까지 기다린다”)했다. 아버지를 돌려보내지 못한 아들이 공장을 나와 희망퇴직원을 썼다. 2010년 5월 아들의 희망퇴직을 자책하며 아버지는 산에서 목 맨 채 발견됐다. 1년 뒤 첫 기일을 치르고 돌아온 아들(▶2011년 8월18일 1면 ‘희망 잃은 한 동료는 목을 맸고…’)은 아버지의 죽음이 서러워 집에서 목(끈이 몸을 지탱하지 못해 생존)을 맸다.

8월4일 경찰이 1차 진압을 개시했다. 조현오가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작전을 지휘(147쪽)했다. 12개 부대와 특공대 4개 제대가 폐수처리장 옥상을 장악했다. 조립공장 옥상 진입을 시도했으나 조합원들의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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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최초들’이 탄생


진압 화면 가운데 엎드린 한 남자를 최노훈(48)이 지목했다. 특공대원이 발과 방패로 남자를 누르고 있었다. 눌려 있던 최노훈이 말했다.

“뛰다가 넘어졌다. 엎드리라고 해서 엎드렸다. 경찰들이 케이블 타이로 두 손을 뒤로 묶었다. 누군가 ‘너희들 때문에 집에도 못 가고 있다’길래 ‘죄송하다’고 했다. ‘죄송하냐’며 방패로 짓누르고 곤봉으로 때렸다. 머리를 들고 있었는데 발로 밟아서 찢어졌다.”

추격과 도주와 연기와 고함으로 뒤섞인 화면 속에서 몸의 기억들이 ‘눌린 자’의 신분을 확인시켰다. 한기태(가명·47)는 코뼈가 부러졌다.

“특공대가 군홧발로 가격해서 코뼈가 나갔다. 넘어진 상태에서 옆구리를 걷어차서 갈비뼈도 두 대 골절됐다.”

8월5일 28개 부대와 특공대 4개 제대가 2차 작전을 시작(336쪽 “대형 참사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과 일부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고뇌에 찬 결단”)했다. 조합원들의 거점인 도장공장은 인화성 물질이 모여 있어 화재·폭발 우려가 컸다. 강희락 경찰청장이 진입을 불허하자 조현오는 명령을 어기고 청와대로 전화했다.

“강 청장은 ‘들어가지 마라(병력을 투입하지 마라)’고 했지만 나는 ‘들어가서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작전에 100% 성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후 강 청장을 제치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대통령이 고민 끝에 허락했다.”(2012년 4월 퇴임 직전 <주간동아> 834호 인터뷰)

작전 개시 직후 “무전기에서 노조원 추락” 소식(152쪽)이 들렸다. 대통령의 승인을 얻은 조현오는 “결의에 찬 지휘”(백서 336)를 계속했다. 진입명령을 거부한 기동대 간부는 파면(2010년 8월 해임처분 취소 판결) 당했다.

“저게 나.”

조문경(54)이 가리켰다. 넘어진 그를 특공대원들이 진압봉으로 때리고 있었다. 그를 덮치는 특공대가 한 명에서 두 명으로, 세 명에서 네 명으로, 다섯 명까지 불어나는 동안 발길질과 곤봉세례도 비례해 늘어났다. 그날 지붕에서 조문경은 졸고 있었다.

“며칠 동안 잠을 못자 너무 피곤했다. 경찰 헬기가 한밤중에도 라이트를 비춰 잠들 수 없게 했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도 비몽사몽인데 특공대를 태운 크레인이 올라왔다.”

경찰 역사상 “헬기를 쌍용차 사태처럼 효과적으로 사용한 예”는 처음(202쪽)이었다.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많은 처음들’이 쌍용차 현장에서 탄생했다. “심야시간대를 선택하여 선회 비행하면서 헬기 서치라이트를 이용”해 “노조원들을 비추는 등 실제 진입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유례없이 긴 시간 공중에 떠” 있으면서 “노조원들에게 긴장감과 심리적 압박”(백서 204)을 가했다.

“헬기 바람작전”(일명 ‘흑선풍 작전’)도 진압에 큰 역할을 했다. “노조원이 옥상에 만든 천막을 날려 보내기도 하고 시위대의 공격을 일순간 약화”(203쪽)시켰다. “최루풍”(337쪽 “저공비행을 하면서 최루액을 살포”)도 쌍용차 공장에서 선보인 고난도 기술이었다.

“바닥에 최루액이 떨어지면 대가리를 밑으로 처박은 헬기가 프로펠러 바람으로 밀어붙였다. 최루액을 싣고 휘몰아치는 바람이 어머어마했다.”(당시 ‘최루풍’ 경험자)

최루액 폭탄(“2~3ℓ 용량의 비닐봉지에 담아 공중에서 투척)도 쌍용차 공장에서 최초로 투하됐다. 경찰이 2009년 사용한 2136ℓ의 95.5%(2042ℓ)가 쌍용차 진압에 사용됐다. 최루액의 발암 경고가 일자 조현오는 “불에 탄 음식·고추장·된장에도 발암물질이 있다”(8월5일 기자회견)고 주장했다. 무해함을 입증하겠다며 연 시연회(2009년 7월24일)에선 최루액을 네 차례 맞은 스티로폼이 녹아내렸다.

특공대를 피해 도망치던 조문경은 제대로 뛰지 못했다.

“공장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누군가 버린 안전화를 신고 있었다. 신발이 커서 도망 중 벗겨졌다. 뛰질 못하니까 포기하고 손을 들었다. 체포에 응하겠다는 뜻이었는데 쫓아오던 경찰이 방패로 세게 밀어버렸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는 순간 경찰이 소화기를 휘둘렀다. 그대로 기절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땐 진압봉이 떨어졌다. 특히 3단봉에 맞을 때는 살에 촤악 감겼다. 무릎 뼈가 함몰돼 아직도 시리다. 특공대 컨테이너 안으로 끌려갔을 때 욕설과 함께 ‘니킥’이 날아왔다. 케이블 타이로 손이 묶인 채 자근자근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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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뱉어낼 수 없는 가시처럼”


8월5일 경찰은 도장 2공장을 뺀 쌍용차 전체를 장악했다. 동력을 잃은 노조는 이튿날 정리해고를 수용하며 ‘77일 파업’을 종료했다. 공장에 남아 있던 458명 중 96명이 연행됐고 65명이 구속됐다. “단일 사건 최다 인원 구속”(266쪽)이 경찰의 성과로 기록됐다. 조합원에게 상해를 입힌 사쪽 직원 중 구속자는 없었다. 폭력 진압한 경찰관 중에서도 처벌자는 나오지 않았다. “전례 없는 대규모 포상(특진 5명·표창 657명)과 특박”(345쪽)이 대신 주어졌다. 경찰은 “공정한 법집행을 하여 용산사태로 실추된 공권력의 위상을 되찾”았다(266쪽)며 자축했다. 대통령이 조현오에게 전화를 걸어 “잘 해결했다”고 격려(<주간동아> 인터뷰)했다.

“이제 한 달은 술 없이 잘 수 없게 됐다.”

진압 영상을 보지 않으려 애쓰던 최성국이 “그때가 눈에 왔다갔다 한다”고 했다. 진압 당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긴급구제 권고를 결정했다. 경찰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일방적 주장만을 반영했다”(389쪽)며 반박했다. 최성국이 찍힌 장면은 경찰이 제시하는 노조 폭력의 대표 사례 중 하나로 거론됐다. 그는 “마지막까지 살상행위를 한 극렬 공격조의 일원”(392쪽)이었고, “쓰러진 특공대원을 무차별 공격하다 제압·검거된 자”였다. 그가 경찰 장봉을 빼앗아 휘두르기까지의 일들은 언급되지 않았다.

“특공대가 컨테이너에서 ‘다목적 발사기’(스펀지탄부터 수류탄까지 장착할 수 있는 장비로 안전성을 두고 의료·인권단체와 경찰간 논란)를 조준 사격했다. 몇 방 맞으니까 다리부터 마비됐다. 두 번인가 기절했다. 누가 깨우는 느낌이 들어 정신이 돌아왔을 때 방패로 내리 찍히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진압봉을 빼앗아 싸웠다. 특공대원들이 ‘저 새끼 죽이라’며 몰려왔다.”

경찰서에서 조사받던 최성국은 발작을 일으키며 병원으로 후송됐다. 두 차례 숨이 멈춰 인공호흡을 받았다. 깨어났을 때 아내가 “일주일만”이라고 알려줬다. 병원은 복부 심부좌상(복부출혈 의심), 전신 다발성 타박상, 과호흡증후군, 공황장애, 뇌진탕(단기 기억상실) 등을 진단했다.

그는 1년 동안 하반신을 쓰지 못했다. 전국의 전문병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비를 대느라 집을 팔았다. “칼로 난도질 당하는 듯해” 진통제 한 통을 다 먹었다가 약물과다복용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아직도 밤마다 악몽을 꾸고 소리를 질렀다.

조문경에게 “그날의 기억은 담배의 니코틴처럼 인이 박혀” 버렸다. “뱉어낼 수 없는 가시처럼” 목에 걸려 그를 찔렀다. 그는 잡혀간 경찰서의 텔레비전에서 특공대원들에게 깔려 있는 자신을 봤다. “도장공장에서 조립공장을 건너다보던 후배가 같이 있던 카메라 기자에게 알려줘서” 촬영된 뉴스 영상이었다. 그 후배는 ‘경찰의 진술 강요(동료의 범죄사실 확인 요구)를 참기 힘들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시도(생존)했다.

최노훈은 분노조절장애로 정신병원을 들고났다. 병을 깨서 배를 그으며 생이 끊어지길 기도한 적도 있었다. 아들을 살리려고 입원시킨 어머니에게 아들은 “한번만 살려달라”며 퇴원을 간청했다. 삶의 의지를 찾기까지 긴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한기태는 쌍용차 경력을 뺀 이력서를 들고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쌍용차 해고자라고 밝히면 취업이 되지 않았다. 공백 기간을 추궁당하다 결국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는 일이 되풀이됐다.

김주중은 취업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신용불량자가 됐다. 회생 절차를 밟고 싶어도 변호사 비용이 없어 ‘불량 딱지’를 떼지 못했다.

조립공장 옥상에서의 일은 10년 동안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다. “머리에 떠올리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송진규), “부모님 아시면 큰일 난다”(김주중)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들 모두 10년째 복직(현재 120명 대기)을 기다리고 있지만 김득중 지부장의 ‘32일 단식’(지난 2월28일~4월1일)에도 회사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원회가 7월 중 발표를 목표로 조사결과를 정리하고 있었다. 진압의 진실이 규명되길 바라며 복면을 벗었으나 진실도 회복시키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그들은 잘 알았다. 해고무효 판결(2014년 2월7일 고등법원)까지 대법원장(양승태)과 대통령(박근혜)의 ‘사법거래’에 희생(2014년 11월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는 나라였다.

“진상이 밝혀진들 망가진 인생이 돌아오겠나.”(최성국)

그들에게 ‘그날의 8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평택/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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