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같은’ 소규모 회사 넘치는 출판업계
육아휴직 보장 않고 휴직 쓰면 자연스레 퇴직
‘남성=생계부양자’ 공식, 여성 외주노동자 내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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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헌법의 평등이념에 따라 고용에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하고 모성 보호와 여성 고용을 촉진하여 남녀고용평등을 실현함과 아울러 근로자의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국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 여성위원회가 지난 3년 동안 여성 출판노동자 25명을 심층면접 조사해 20일 발표한 ‘2018 출판산업 여성노동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출판업계의 여성 노동자들이 왜 어렵게 입사해서 확보한 정규직 일자리를 포기하고 ‘자진 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1. 육아휴직은 ‘권리’ 아닌 사장님의 ‘배려’였다
“전례가 없었어요. 그런 얘기(육아휴직 신청)를 못 들어봤고, 다른 자회사에서 그걸 시도하다가 ‘못 해준다’ 그래서 그냥 퇴직한 선배가 몇 명 있었고요. 이 회사는 점잖은 분위기에서 일을 하니까 누구도 ‘육아휴직? 그거 뭐야? 나가!’ 이런 일은 없어요. 근데 그냥 상황이 육아휴직을 쓰지 못해서 나가게 된 케이스가 몇 명 있었거든요. 그래서 말도 못 꺼내 봤어요.” (편집 노동자 ㄹ씨)
“그거(출산 뒤 육아휴직 6개월을 요구한 팀장이 권고사직 형태로 회사를 그만둠) 할 때에도 OO팀 팀장님이나 저나 ‘우리 회사에 여직원이 많고, 출산을 할텐데 선례가 이렇게 안 좋으면 여기 있는 직원들이 회사에 애사심을 갖겠나?’라고 되게 말렸었는데, 결국에는 그렇게 처리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암암리에 회사 분위기는 ‘출산, 임신을 하면 회사를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마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데…” (디자인 노동자 ㅌ씨)
2.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는 법을 지키지 않았다
“한창 일해야 하는 전문직의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 (임신과 출산 때문에) 갑자기 일과 출근을 못 하게 되는 거, 그게 저는 가장 (문제가) 크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출판사의 규모가 대부분 작기 때문에 거기서 한 사람이 빠지게 되면 대체할 만한 인력을 뽑는 것도 어렵고, 뽑았다고 한들 이 사람(여성 노동자)이 다시 (회사에) 돌아올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근데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나를 다시 부를 거라는 보장이 없고….” (디자인 노동자 ㅌ씨)
“이 직업이 정시 출근해서 정시 퇴근이면 크게 고민을 안 하겠지만 야근할 수도 있고, 책 나올 때 인쇄소 가서 감리도 봐야 되면 뭐 하루 새벽 후딱 가고. 뭐 그러다 보니까 이게 저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중략) 회사 입장을 생각하면 회사 입장도 생각하고, 내 이기심을 내세우자니 그것도 정말 이기적인 것 같고, 결국에는 육아와 관련해서 고려나 이해를 해줄 수 있는 회사가 있을까 싶은 게….” (편집 노동자 ㅁ씨)
“사실 일을 하고 싶다는 것과 자녀를 낳는다는 게 같이 갈 수 없어요. (회사와 동료들에게) 무슨 염치인가 싶어요.” (편집 노동자 ㅋ씨)
특히 이런 소규모 출판사들의 경우 여성 노동자가 임신과 출산, 육아를 위해 휴직을 신청했을 때 ‘인력공백’ 문제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의 장기간 휴직으로 회사와 동료들이 업무 부담을 져야 하는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5인 이하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ㅋ씨가 “편집자가 한두 명인 작은 출판사에서 육아휴직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며 “만약 둘째를 갖게 된다면 ‘염치상’ 퇴사를 하게 될 것 같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물론 출산과 육아에 따른 ‘인력공백’ 부담감을 호소한 이들 중에는 상시 고용 인원 300인 이상의 출판사에 근무하는 한 여성 노동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출판사일수록 육아휴직에 따른 죄책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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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엄마는 어떻게 ‘고강도 외주노동’에 내몰리는가
“애를 누가 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애를 맡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까, 내가 애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이것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어서 결국 외주로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중략) 3중고에 시달리는 노동이 이제 시작된 거죠. 살림 다 하고, 육아 다 하고, 일 다 하고…. 진짜 제가 거짓말이 아니고 거의 10년 정도를 정말 고3처럼 살았어요. 하루에 4시간밖에 못 잤어요.” (외주 편집 노동자 ㅈ씨)
“제일 짜증날 때가 저녁. 편집 일이라는 게 집중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있잖아요. 원고의 흐름을 타야 되는데. 그래서 자꾸 밤 늦게 하게 되는 거. 말 거는 사람 없고 애기도 푹 자니까요. 낮에는 집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저 스스로 밥도 챙겨 먹어야 되고 그런 거 하다 보면 집안 일 같은 것도 보이고. 또 저녁에 뭐 할 만하면 애기가 와 가지고 씻기고 재우고 그러면, 계속 흐름이 끊길 만한 일들이 끊임없이 생겨요.” (편집 노동자 ㅊ씨)
출판업계 여성들이 어렵게 들어간 정규직 일자리를 ‘자진 퇴사’하고 가사와 육아, 외주 노동을 함께 하게 된 이유에는 출판업계 내부의 문제만 있는 건 아닙니다. ㅈ씨는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고 외주 일을 하게 된 것은 “가정을 책임진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 제일 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만약 살림을 하면서 육아를 해야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면, 외주 일을 하지 않고 계속 직장에 다녔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남성이 가족의 생계 부양을 전담하고, 여성은 피부양자로서 가사 및 육아를 전담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의 영향이 컸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실 ‘생계부양자 남성/가사 노동자 여성’이라는 성 역할 모델은 극히 일부 중산층만의 전형일 뿐,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은 생계부양자이자 가사 노동자다. (중략) 잠재적 어머니로 분류되는 여성 노동자는 노동시장 진입에서부터 임금, 승진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냐, 노동자냐’라는 정체성을 택할 것을 강요받거나 택일하지 못할 바에야 둘 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2013) 58쪽
‘외주출판노동자 실태조사 사업단’이 2013년 발표한 ‘외주출판노동자 노동실태 연구보고서’(외주 출판노동자 427명 설문·2011년 기준)를 보면, 전체 응답자의 52.1%가 하루 평균 8시간 이상을 일하며, 마감을 앞두고는 12시간 이상 일에 매달린다는 응답도 42%나 됐습니다. 더욱이 이런 ‘고강도 노동’을 요구하는 마감일이 한 달 기준 ‘5일 이상∼7일 미만’에 달하는 경우도 40.2%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 사람들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
“외주노동자로 일한다고 하면, 어른들도 ‘여자한테 좋은 직업’이라고 막 그래요. 집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근데 그런 얘기 듣기도 싫거든요. 사실 이게 비정규직이지 뭐가 좋은 직업이야.” (편집 노동자 ㅊ씨)
“시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요. ‘집에서 애 키우면서 돈까지 버는 게 너무 기특하다’고. 애 키우면서 돈까지 버니까 너무 기특하대. 칭찬하려고 얘길 하신 거겠죠. 근데 저 굉장히 기분이 나빴어요. 그 순간에 ‘저 분은 내가 집에서 어떤 노동을 감수하고 있는지 알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외주 편집 노동자 ㅈ씨)
5. 임금도 계약서도 경력도 ‘숨어버린’ 외주노동
“경력은 계속 올랐는데, 경력은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이 바로 이거예요. 근데 모든 비정규직이 사실 그렇잖아요. 경력 인정 못 받잖아요. 그거랑 똑같아요. 경력 인정 못 받고, 노후보장 안 되고, 저희는 아무런 퇴직금이 없잖아요. 연금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국민연금도 안 되고, 자기가 직접 가입하지 않으면 안 되고.” (외주 편집 노동자 ㅈ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업계 여성 외주 노동자들은 여전히 ‘집에서 노는 여자’라는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편집 노동자 ㅁ씨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를 되새겨볼 만합니다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여성에게 원하는 삶이 너무 많아요. 댓글 보면 항상 그게 나오잖아요. 이놈의 나라는 여자가 일을 하면 집에서 애 안 본다고 욕하고, 집에서 놀면 남편 등골 빼먹는다고 욕하고, 회사 가면은 여자가 일하길 바라면서도 자기 아내는 빨리 들어와서 집안일 해주길 바라고. 그러니까 여성에게 바라는 상이 너무 많은 거죠.” (편집 노동자 ㅁ씨)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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