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7] 나폴레옹을 떠나보낸 자리엔 그리움만 쌓여있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왕들이 사랑한 퐁텐블로 城

조선일보

“근위대 병사들이여, 작별을 고하노라. 20년 동안 그대들은 늘 명예와 영광의 길을 걸었고, 마지막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용기와 충성을 보여주었다. 친구들이여, 내 운명을 가여워하지 마라.”

1814년 4월 20일 정오, 나폴레옹은 자신 앞에 도열해 있는 제국근위대 병사들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퐁텐블로 성(城)의 슈발 블랑 앞뜰에서 거행된 그의 마지막 열병식에서였다. 슬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20년 동안 전 유럽 위에 군림했던 작은 거인의 마지막 가는 길.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병(老兵)들에게 나폴레옹은 언제나 사선(死線)을 함께 넘은 전우였고, 꼬마 하사였다. 이제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친구와 가족들은 은인(恩人)인 나폴레옹을 배신했고, 영원히 황제를 지지할 것 같던 국민의 애정은 차갑게 식었다.

조선일보

길게 늘어선 웅장한 퐁텐블로의 성관. 12세기부터 800년 동안 이곳의 숲과 성은 왕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곳에는 그들의 애증과 흥망성쇠가 켜켜이 쌓여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적들의 전의(戰意)는 여전히 굳건했다. 더 큰 희생을 원치 않았던 황제는 맞서 싸우기를 포기했다. 대신 퇴위에 동의했다. 결사적으로 시도한 자살마저 실패하자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근위대의 노병들과 작별을 마친 시민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향해 떠났다. 거대한 퐁텐블로 성과 울창한 사월의 퐁텐블로 숲만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거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예술을 사랑한 왕, 궁전을 건설하다

조선일보

이곳 퐁텐블로(Fontainebleau)에 발자취를 남긴 권력자가 나폴레옹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지막도 아니었다. 카페 왕조로부터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를 거쳐 나폴레옹 왕조에 이르기까지 숱한 프랑스의 왕과 권력자들이 이곳에 자신을 남겼다. 그래서 퐁텐블로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설렌다. 파리에서 60㎞쯤 남동쪽에 위치한 퐁텐블로는 광활한 자연림 자체다. 12세기부터 왕실의 수렵지로 보호받아온 덕분이다. 연초록이 피어나는 초봄부터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까지 이곳에는 상쾌한 숲 내음이 가득하다. 그 숲의 한가운데 그림 같은 성(城)이 자리 잡고 있다. 왕들의 사냥 숙소와 요새가 있던 곳에 오늘날의 주거용 성을 세우기 시작한 건 프랑스 최초의 르네상스 군주인 프랑수아 1세(FrancoisⅠ·재위 기간 1515~1547년)였다.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투에서 패배해 마드리드에 인질로 끌려갔던 왕은 돌아오자마자 퐁텐블로에 거대한 궁전 건축을 시작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건축과 예술의 힘으로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었다. 왕은 르네상스의 절정을 구가하던 이탈리아에서 건축가와 예술가를 대거 초빙했고, 그들의 손에 의해 퐁텐블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성은 곧 새로운 예술의 실험장인 동시에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프랑수아 1세는 성 곳곳에 자신의 이니셜 'F'와 문장인 '불도마뱀'을 새겨 넣었는데, 특히 '프랑수아 1세 갤러리'라는 궁전의 가장 긴 회랑은 사방이 'F'로 장식돼 있다.

사랑에 빠진 왕, 愛人의 문장을 새기다

조선일보

프랑스 최초의 르네상스 군주인 프랑수아 1세. 그는 퐁텐블로에 최초로 주거용 궁전을 세웠고 루아르 강변에 샹보르 성을 건설하는 등 프랑스에 르네상스 문화를 도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랑수아 1세는 열정적으로 권력과 예술, 수많은 여인을 사랑했다. 반면에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앙리 2세(Henri Ⅱ·재위 1547~1559)는 오직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 그녀의 이름은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1499~1566). 차갑지만 매혹적인 미인이었다. 노르망디 대판관 루이 드 브레제의 미망인이었던 디안은 앙리 2세가 평생 사랑했던 유일한 여인이었다. 왕은 퐁텐블로에서 스무 살이나 연상이었던 디안과 뜨겁게 사랑했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끝내지 못한 궁전 공사도 앙리 2세의 몫이었다.

왕은 특히 거대한 무도회장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곳을 자신의 이니셜 'H'와 디안의 이니셜 'D'로 도배했다. 디안의 상징인 세 개의 초승달을 겹친 문장도 곳곳에 새겼다. 왕의 애인에게는 전례 없는 특권이었다. 앙리 2세의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슬픔이었다. 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 거대한 볼룸에 들어서면 누구라도 이성을 잃은 왕의 사랑이 느껴질 것이다. 다음으로는 왕을 차지한 후궁의 오만이, 왕의 사랑을 잃은 왕비의 처절한 고통이 밀려올 것이다.

권력에 취한 왕, '종교 관용'을 버리다

퐁텐블로에서 이성(理性)을 잃은 건 앙리 2세만이 아니었다. 태양왕 루이 14세(Louis ⅩⅣ·재위 1643~1715)도 이곳에서 이성을 잃었다. 이유는 달랐다. 앙리 2세는 사랑 때문에, 루이 14세는 교만 때문에. 권력에 취한 태양왕은 자신의 왕국에 가톨릭 이외의 종교가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1685년 10월 루이 14세는 퐁텐블로에서 새로운 칙령을 반포해 낭트의 칙령(1598년)을 폐지했다.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앙리 4세가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위해 선택했던 종교 관용 정책을 버린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였던 루이 13세가 같은 가톨릭 국가이면서 종교적 불관용을 국시(國是)로 내걸었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기반을 스스로 걷어찬 것이다. 권력에 취했기 때문이다.

왕은 위그노(프랑스의 신교도를 일컫는 단어)의 교회와 학교의 문을 닫았다. 위그노에게 개종을 강요했다. 싫으면 고국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기록마다 다르지만 적게는 20만명에서 많게는 90만명에 이르는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후반이란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의 이산(離散)이었다.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프로이센 등 신교 국가가 위그노들의 도피처였다. 루이 14세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위그노의 이탈과 함께 프랑스는 가장 능력 있고 활력 있는 집단을 잃었다. 관용과 다양성이란 중요한 사회적 가치도 사라졌다. 프랑스는 이때 입은 피해를 결국 만회하지 못했다.

조선일보

퇴임하는 나폴레옹이 근위대원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 퇴위하다 혁명은 구체제의 많은 유산을 파괴했다. 퐁텐블로도 약탈당했지만 복원됐다. '혁명의 아들'로 왕좌에 오른 나폴레옹이 구체제의 왕들처럼 퐁텐블로의 궁전과 숲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1500여 개의 방을 보유한 궁전의 규모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켜켜이 쌓인 역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폴레옹 자신도 이곳에 역사를 남겼다. 대표적인 유산은 왕좌의 방(Throne Room)과 위원회 회의실(Council Chamber)이다. 나폴레옹이 주로 사용했던 공간의 특징은 그곳에 놓인 대부분의 의자가 군용 의자처럼 등받이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각료와 장군들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긴장한 상태로 황제와 국사(國事)를 논의해야 했다. 일벌레였던 황제는 신하와 측근들에게 편안함을 선사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황제의 단아한 옥좌와 퇴위 문서에 서명할 당시 사용했던 조그만 테이블은 권력의 무상함을 강렬하게 상기시켜 준다. 이곳에서 그는 통치했고, 항복했고, 퇴위했다. 궁전을 빠져나오면 번듯하고 정교하게 구획된 너른 정원이다. 그 뒤로 눈길이 닿는 지평선까지 왕들의 사냥터가 펼쳐져 있다. 지금 이곳 전부는 시민의 놀이터다. 그 많던 왕들도 모두 떠나고 궁과 숲만 남은 것이다. 왕들의 사랑도, 교만도, 야망도 결국 영원하진 못했다. 사람의 일이란 원래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진 않다. 권력에 취해 잊을 뿐이다. 퐁텐블로는 그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대놓고 바람·바람·바람… 앙리 2세, 20세 연상녀와 사랑

조선일보

앙리 2세(왼쪽)와 그의 연인 디안.


앙리 2세는 평생 스무 살 연상인 디안 드 푸아티에를 사랑했다. 십대나 이십대는 물론이고 죽기 직전까지도 환갑 나이의 디안을 사랑했다. 둘은 1526년 3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지대의 강가에서 처음 만났다. 앙리가 형과 함께 아버지를 대신해 인질로 마드리드로 끌려갈 때였다.

그때 27세의 눈부신 디안이 일곱 살의 어린 왕자에게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낯선 땅으로,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왕자에게 아름다운 디안은 각인됐다. 포로에서 풀려난 후 형이 죽자, 앙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앙리 2세의 치세(治世) 기간은 곧 디안의 전성기였다. 그녀는 최고의 권력자였고, 왕비는 허수아비였다. 왕비가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것도, 디안이 왕에게 요구해서 가능했다. 심지어 왕의 아이들도 디안이 길렀다. 왕과 왕비, 디안의 기묘한 삼각관계는 왕이 죽는 순간까지 20년 동안 계속됐다. 앙리 2세가 죽은 후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치는 관대하게 디안을 용서했고, 그녀는 천수를 누린 후 자신의 성(城)에서 잠들었다. 하지만 결국 왕의 옆에 묻힌 것은 평생 사랑받지 못한 왕비였다.

[퐁텐블로=송동훈 문명탐험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