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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미의식과 욕망의 수준이 사회와 국가의 품격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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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지음, 민병걸 옮김, 안그라픽스 펴냄)
내일의 디자인 (하라 켄야 지음, 이규원 옮김, 안그라픽스 펴냄)

매일경제

하라 켄야 /사진=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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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의 책으로 세상읽기-13] 파타고니아를 입는 것은 단순히 아웃도어 옷을 입는 행위가 아니다. 아이폰을 선택하는 이유도 스마트폰이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필요를 넘어서는 가치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작용해서이다.

소비 행위에는 '필요'뿐만 아니라 '가치'가 담겨 있다. 필요를 넘어서는 가치가 많이 담겨 있을수록 좋은 브랜드다. 그리고 그 가치와 브랜드를 현실화시키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우리 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 중에 과연 '필요를 넘어서는 가치'를 담고 있는 제품들이 있는가? 대답은 절망적이다.

하라 켄야(原硏哉) 일본디자인센터 대표의 책 '디자인의 디자인'과 '내일의 디자인'에는 '필요를 넘어서는 가치'를 제품에 담는 방법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시와 삶에 가치를 더하는 방법이 담겨 있다.

하라 켄야는 한 국가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국내총생산(GDP)이 아니라 욕망과 미의식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상품의 모태가 되는 시장의 욕망 수준이 글로벌 시장에서 상품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마케팅과는 다른 심도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문제이다. 그러한 문제를 생각해 나가는 것이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다."('디자인의 디자인' 151쪽)


수준 높은 욕망과 미의식으로 다툴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우리의 후진 욕망과 미의식을 먼저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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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시게루의 화장지(좌)와 멘데 카오루의 성냥(우) /사진=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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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디자인

'디자인의 디자인'은 첫장부터 매혹적이다. 하라 켄야는 '다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디자인은 비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답한다.

"세상이 기술과 경제를 이끌고 막무가내로 앞으로만 나가려고 하는 바람에 종종 생활 속의 미의식은 그 급격한 변화를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시대가 나아가려는 방향으로 눈길을 향하기보다 오히려 그 비명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 변화 가운데서 사라져 가는 섬세한 가치들에 눈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9쪽)


이처럼 범상치 않은 디자인 철학을 가진 하라 켄야는 '진보'와 '창의성'에 대해서도 통념과 다른 질문을 던진다.

"시대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만이 반드시 진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미래와 과거의 좁은 틈 사이에 서 있다. 창조적인 일들의 실마리는, 사회 전체가 바라보는 그 시선들 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사회의 배후로부터 통찰하는 듯한 시선의 연장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앞에는 미래가 있지만 배후에는 유구한 역사가 창조의 자원으로 축적되어 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순환하는 발상의 역동성이 크리에이티브가 아닐까"(10쪽)


실제 그의 디자인은 자연에서, 그리고 일본 전통 속에서 모티브를 찾는 것이 많다. 그가 자연에서,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 디자인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래야 미래의 기술이 인간을 위한 기술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이제까지의 것들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옛것'이 '새것'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로 선택의 폭이 늘어난다."(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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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미술관 /사진=안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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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0년 4월 '리디자인-일상의 21세기' 전시회를 기획했다. 32명의 디자이너가 화장지, 성냥 등 친근한 물건들을 다시 디자인한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여기서 전시된 작품들이 '반시게루의 사각형 화장지' '사토 마사히코의 출입국 스탬프' '멘데 가오루의 성냥'등이다.

하라 켄야는 "디자인은 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문명비평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것들에 반성적 계기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가 '리디자인' 전을 기획한 것은 그가 바라보는 2세기가 새로운 것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기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던 것들을 리디자인하는 세기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 때문이다. 그래야 지구 위에서의 삶이 지속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21세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 만들어지고 무엇이든 끊임없이 혁신되어 나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발상을 오히려 20세기에 남겨두고 오는 편이 좋다. 새로운 시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일상이 끊임없이 미지화되어 새롭게 등장하는 시대다. 새로운 것이 파도처럼 저 멀리서 밀려오는 이미지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의 디자인 철학은 '무인양품'이라는 브랜드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무인양품'의 정신을 '궁극적인 합리성'이라고 했다.

수많은 브랜드가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방향성을 추구하지만 무인양품은 '이것이 좋다'가 아니라 '이것으로 충분하다'를 목표로 삼고 있다.

"자유란 '~이'에 가까운 가치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이'는 가끔 집착을 포함한 에고이즘을 만들어 불협화음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결국 인류는 '~이'를 향하여 지나치게 줄달음치다 이제는 막다른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소비 사회도 개별 문화도 '~이'로 달음박질치다 세계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으로' 속에 작용하는 억제나 양보 그리고 한 발 물러선 이성을 평가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으로'는 '~이'보다 한 수 높은 자유의 형태가 아닐까?"(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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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무인양품이 '낮은 품질에 만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으로'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이런 철학은 가격 정책에도 드러난다. 하라 켄야는 노동력이 싼 나라에서 생산해서 비싼 나라에 파는 구조는 영속성이 없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경제 격차를 전제 조건으로 하고 이 구조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세계화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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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켄야 /사진=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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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디자인

'내일의 디자인'에는 '미의식이 만드는 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 부제 자체가 이 책의 주제의식이다. 미래의 행복, 미래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은 숫자로 표시되는 경제력의 규모가 아니라 '미의식'과 '욕망의 수준'이라고 하라 켄야는 생각한다.

"고도성장 시설부터 GDP를 자랑이라 생각해왔지만, 이제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다. GDP는 인구가 많은 나라에 양보하고 일본은 현대 생활을, 나아가 먼 미래를 내다봤으면 한다. (중략) 기술도 생활도 예술도, 그 성장점의 첨단에는 미세하게 경련하면서 세계나 미래를 섬세하게 감지하는 감수성이 기능하고 있다. 거기에 시선을 모아야 한다. 세계는 미의식으로 다툴 때 풍요해질 수 있다"(17쪽)


하라 켄야는 '이동수단' '집' '관광' '소재산업' '사회구조' 등 미래를 디자인하는 데 미의식과 일본적 가치를 어떻게 반영할지 구체적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가장 인상적인 조언은 섬유패션 산업에서 일본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기능한다는 주체성을 갖는 것. 이것이 요즘 내가 늘 품고 있는 생각 가운데 하나다. '인정받는다'는 수동태에는 뭔가 커다란 힘이나 문화에 의존하는 안이함이 느껴진다. "(185쪽)


"일본은 독자적이고 새로운 섬유 정보의 흐름을 주체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패션'하고는 오히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의류 영역을 벗어나 생활 공간을 통해 인간을 더 폭넓게 포착하는 새로운 크리에이션 영역을 만들고, 인간 환경 섬유가 교차하는 곳에서 어떤 새로운 가치를, 그리고 설렘을 발견해나가야 한다."

이는 단지 패션 산업에만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패션 산업은 모든 산업 중 가장 강력한 권위 구조를 갖고 있는 분야다. 파리와 밀라노로 대표되는 기존 권위 집단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 분야다. 하라 켄야의 주장은 이와 같은 서양 중심의 가치 위계를 깨자는 얘기다.

관광 산업도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해야만 한다고 하라 켄야는 제안한다. 우리는 여행의 목적에 따라 여행지를 정한다. 휴식이 필요할 때는 주로 발리나 푸껫같은 휴양지로 여행을 가고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시야를 넓히고 싶을 때는 파리나 뉴욕, 런던으로 향한다.

발리의 관광 상품은 '휴식'이고 파리의 관광 상품은 '동경'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광 상품은 무엇인가?

우리 정부는 마치 대형 쇼핑몰과 면세점을 중국인을 위한 우리의 관광 상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과연 그런가? 그런 상품이 지속성이 있는가? 이미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관광 상품은 '휴식'도 아니고 '동경'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경험'과 '미의식'이다.

"일본의 미의식이 미래 자원이라면 그것을 관광이라는 산업에서 구체적으로 살릴 방법은 없을까. 그 한 가지 사례로서 참조하고 싶은 것이 싱가포르에서 자란 인도네시아인 에이드리언 제카가 구성한 호텔 그룹 아만 리조트다. 아만은 서양식 운영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 합리성을 부정하는 안티 호텔로서의 독자적 경영 철학으로 리조트호텔이라는 사고방식에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 왔다."(134쪽)

"그것은 바로 '경험의 디자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인데, 호텔에서 지내는 모든 순간 모든 찰나를 파이 껍질처럼 켜켜이 쌓아나감으로써 완성되어가는 '접대라는 직물' 같은 것이다."(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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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미의식'이 전통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세토나이카이의 7개 섬을 묶어 경이로운 구상력과 실현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관광객이 찾은 아트밸리로 탈바꿈시켰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나오시마의 이우환 미술관이 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 미술관 하나가 섬 전체를 예술의 섬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우환'의 가치를 우리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일본은 알아봤다는 것이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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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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